항목 ID | GC600050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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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樓亭-樓亭文學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 |
집필자 | 박세인 |
[정의]
광주광역시 지역에 있는 누정과 누정을 대상으로 제작된 문학작품.
[개설]
누정은 누각을 의미하는 '누(樓)'와 정자를 의미하는 '정(亭)'을 합친 용어로, 주거 공간과 구분되는 별개의 건축물이다. 누정은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왕실이나 관(官)에서 운영한 공적 누정이 대부분이었으나. 16세기 이후부터 개인이 경영하는 사설(私設) 누정이 크게 증가하였다. 사설 누정이 증가하면서 출입하는 문인들에 의해 누정문학이 광범위하게 제작되었다. 광주 지역 또한 16세기부터 사대부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주도로 누정이 본격적으로 조영되기 시작한 이후 근대 시기까지 많은 누정이 건립되었다.
광주 지역 소재 누정 현황은 1985년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구 호남문화연구소]이 실시한 광주 지역 누정 조사 연구를 통해서 전반적으로 밝혀졌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광주 지역에는 총 105개소의 누정이 있었으며, 이 중 47개소가 당시까지 존재한 현존(現存) 누정이고, 58개소는 유실된 부존(不存) 누정이다. 또한 호남의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광주 지역에 가장 많은 누정제영(樓亭題詠) 작품이 전하고 있다. 이는 광주의 누정이 지역 문인들의 주요한 친교의 공간이자 타 지역 문인들과의 소통을 촉발하는 매개 공간이었으며, 다채로운 누정문학이 제작되고 향유된 문예적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광주의 누정과 누정문학은 전통시대 문인들의 다기한 교유망과 인문적 지평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의 주요 누정과 누정문학]
누정을 대상으로 제작된 누정문학에는 다양한 양식이 있지만, 이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갈래는 누정제영이다. 누정제영은 누정의 당호나 주변 경관을 제명(題名)으로 삼아 창작한 시를 말한다. 누정문학에 대한 탐색은 통상적으로 누정제영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광주광역시 지역에 현존하는 47개 누정 중 누정문학의 형성과 흥기 과정에서 언급되는 주요 누정은 대체로 16~17세기에 조영된 곳들이 많다. 누정문학이 본격화되는 조선 중기에 건립되고, 누정제영이 잘 전승되고 있어서 출입 인사들의 교유 관계와 문학적 성취를 탐색할 수 있는 누정으로 양과동정(良苽洞亭)·부용정(芙蓉亭)·읍취정(挹翠亭)·환벽당(環碧堂)·풍암정(風岩亭)·호가정(浩歌亭)·풍영정(風詠亭) 등을 들 수 있다.
〈양과동정〉
양과동정은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에 자리하고 있다. 옛 삼한이나 신라 때부터 누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건립 시기에 대한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양과동정은 동약(洞約)·향약(鄕約) 등이 시행되는 등 마을의 중요한 회합과 소통의 공간이었다. 고경명(高敬命)의 「제양과모정(題良瓜茅亭)」을 포함하여 송인수(宋麟壽), 박광옥(朴光玉) 등의 시문이 남아 있다.
〈부용정〉
부용정은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에 자리하고 있다. 15세기 초엽 김문발(金文發)이 세운 누정으로, 광주 지역에서 향약이 처음 시행된 곳으로 유명하다. 김문발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운 인물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용정을 경영하며 여생을 마쳤다. 부용정에는 10수의 제영시 현판이 걸려 있는데, 양응정(梁應鼎)의 칠언절구 「부용정(芙蓉亭)」을 비롯하여 고경명·이안눌(李安訥) 등의 시가 전하고 있다.
〈읍취정〉
읍취정은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에 자리한 누정이다. 1593년(선조 26)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읍취(挹翠) 이방필(李邦弼)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창축하였다. 건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며, 1691년(숙종 17)에 중창한 기록만 전한다. 읍취정에는 7수의 제영시 현판이 있는데, 기우만(奇宇萬)·이장헌(李章憲)·이재순(李載純)·송병제(宋秉濟) 등 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일본을 비롯한 외세에 저항했던 문인들이 제작한 시문들이다.
〈환벽당〉
환벽당은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가 은퇴한 후 16세기 후반에 지은 누정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자리하고 있다. 누정 앞으로 일명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리는 증암천(甑岩川)이 흐르고 있는데, 환벽당은 그 너머에 자리한 식영정(息影亭)·소쇄원(瀟灑園) 등과 함께 16세기 호남 누정문학의 산실 역할을 해왔다. 한편으로 조선 전기 시가문학의 대가인 정철(鄭澈)이 김윤제를 만나 김윤제의 외손녀 사위가 되고, 출사할 때까지 수학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환벽당의 초기 형태는 소세양(蘇世讓)의 시 「제김목사림정(題金牧使林亭)」이나 김성원의 문집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 수록된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擢熱圖)」등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특히 「성산계류탁열도」에는 환벽당의 주변 경관과 함께 당시 누정 일원에서 향유된 문인들의 풍류 문화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이후 김창흡(金昌翕)이 쓴 『남유일기(南遊日記)』를 통해 18세기 초 환벽당 원림의 규모나 조경의 특징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환벽당'이라는 당호 편액은 송시열(宋時烈)이 썼으며, 경내 현판에는 임억령(林億齡)과 조상건(趙尙健)의 제영시가 판각되어 있다. 이 밖에 김윤제와 친교가 깊었던 송순(宋純)·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정철·백광훈(白光勳)·고경명 등 호남의 이름난 시인들이 제작한 환벽당 제영시가 여러 편 전하고 있다. 또한 권필(權韠)·목장흠(睦長欽)·이하곤(李夏坤)·이명한(李明漢)·김창흡·서봉령(徐鳳翎) 등 다른 지역 출신 문인들도 환벽당을 소재로 다양한 시문을 남기고 있다. 이를 통해 16세기 당시 호남에서 가히 '환벽당 시단'이라 부를 만한 문학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나아가 지역과 시대를 넘어 환벽당을 매개로 광범위한 작시(作詩) 풍류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풍암정〉
풍암정은 김덕보(金德普)가 경영한 누정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자리하고 있다. ‘풍암’이라는 당호는 김덕보의 호를 따라 지은 것이다. 김덕보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크게 활약한 김덕홍(金德弘)과 김덕령(金德齡)의 동생이다. 김덕홍은 충청도 금산(錦山) 싸움에서 의병장 고경명 등과 함께 순절하였으며, 충장공(忠壯公) 김덕령은 의병장으로서 익호장군(翼虎將軍)·초승장군(超乘將軍) 등으로 불리며 큰 공훈을 세웠으나 무고에 의해 옥사하였다. 김덕보는 중형(仲兄)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에 크게 상심하고, 이후 무등산 자락에 있는 풍암정에 은둔하며 학문과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풍암정 앞의 바위 모서리에 ‘풍암(楓巖)’이라는 글자가 각자되어 있으며, 누정 안에는 ‘풍암정사(楓巖精舍)’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경내의 또 다른 편액에는 김덕보를 비롯하여 임억령·임식(林植)·고경명·안방준(安邦俊)·정홍명(鄭弘溟) 등의 제영시가 판각되어 있다. 주요 현판의 시를 살펴보면, 김덕보는 풍암정에서 누리는 은일한 삶에 대한 만족감을 노래하고 있고, 임억령은 풍암정 주변의 승경을 예찬하고 있으며, 안방준의 시는 김덕보의 고매한 인품을 기리는 내용이다. 이 밖에 정홍명의 「풍암기」현판에는 17세기 당시 풍암정 주변 경관과 누정의 위상이 잘 드러나 있다.
〈호가정〉
호가정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덕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16세기 문신인 설강(雪江) 유사(柳泗)가 조영하였다. 유사는 권신(權臣)을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낙향했는데, 이때 호가정을 지었다고 한다. 누정의 당호는 중국 송나라 소옹(邵雍)이 읊은 "음아부족수호가(吟哦不足遂浩歌)"라는 시구에서 취한 것이다. 귀향한 후에도 유사에게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여생을 마쳤다.
호가정 현판 글씨는 민치상(閔致庠)이 썼으며, 경내에 유사가 지은 「호가정기」와 19세기 이름난 유학자인 기정진(奇正鎭)이 쓴 「호가정중건기」 등이 전하고 있어서 누정의 건립 내력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이 외에 유사의 사위인 김성원을 비롯하여 오겸(吳謙)·이안눌(李安訥)·이재순(李在純)·김재석(金載石) 등이 호가정 제영시를 남기고 있다. 이 중 17세기 빼어난 시인으로 꼽히는 이안눌의 제영시는 1610년(광해군 2)에 지어진 작픔으로, 담양부사(潭陽府使)로 재임하는 중에 호가정을 방문하고 누정 주변의 승경에 대한 감상을 읊은 것이다.
〈풍영정〉
풍영정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극락강 가에 자리한 누정이다. 누정 앞으로 칠천(漆川)[극락강의 옛 명칭]이 흐르고 있으며 누대에서 무등산이 조망되는 등 매우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칠계(漆溪) 김언거(金彦据)가 퇴휴한 후 여생을 보내기 위한 별서 공간으로 건립하였다. 이후 풍영정에서 광주 지역을 넘어 다른 지역의 학자 및 문인들과 다각적인 교유가 이루어졌다. ‘풍영’이라는 당호는 『논어(論語)』 「선진(先進)」편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 부르며 돌아오겠다[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는 증점(曾點)의 말에서 빌려온 것이다. 세상의 온갖 헛된 잡념을 버리고 자연을 벗 삼아 심신을 수양하겠다는 김언거의 의지를 담은 것이다.
풍영정 제영시는 같은 시기 다른 누정 제영시를 압도할 만큼 많은 작품이 제작되었다. 현재 전하고 있는 풍영정 제영시는 김인후·이황(李滉)·임억령 등 세 사람의 연작제영 「칠계십영(漆溪十詠)」을 포함하여 약 180여 편 정도이다. 이와 같은 대규모 누정제영이 창작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김언거의 광범위한 문학적 교유를 들 수 있다. 김언거는 「칠계십영」을 지은 세 사람 외에도 기대승·송순·나세찬(羅世纘)·유희춘(柳希春)·유사·박광옥(朴光玉)·정철 등 호남 문인뿐 아니라, 황준량(黃俊良)·송인수(宋麟壽)·조식(曺植)·주세붕(周世鵬)·엄흔(嚴昕) 등 다른 지역 문인들과도 폭넓게 교유하였다.
당시 김언거와 친분이 깊었던 이황의 『퇴계집(退溪集)』을 보면, 누정 건립 초기에 김언거가 여러 문인들에게 풍영정에 부칠 시문을 의뢰하고 수집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누정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풍영정 제영시는 김언거 사후에도 활발히 제작되었다. 풍영정은 광주·나주·장성을 잇는 절묘한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에 따라 다양한 문인들이 풍영정을 방문해서 시를 창작하였고, 광주 지역이나 인근 지방의 관리로 부임한 관리들 중 많은 이들이 교통이 편하고 명성이 높은 풍영정 제영시를 남긴 것이다.
현재 풍영정에는 58개의 현판에 약 80여 수의 제영시가 판각되어 있다. 이 중 55개는 송인수의 원운과 차운시이며, 남은 3개의 현판은 「칠계십영」을 새긴 것이다. 80여 수에 이르는 풍영정 차운시들은 모두 송인수의 원운시 운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시의 내용을 보면 귀전(歸田)에 대한 열망, 일상적 근심의 해소처로서 누정 예찬, 선인들에 대한 회상과 소회 등 다채로운 내용을 노래하고 있다. 「칠계십영」은 김인후·이황·임억령 세 사람이 각각 10수씩 지은 연작제영이다.
한 편을 이루는 10수의 시는 「선창범주(仙滄泛舟)」·「현봉요월(懸峯邀月)」·「서석청운(瑞石晴雲)」·「금성제설(錦城霽雪)」·「월출묘애(月岀杳靄)」·「나산촌점(羅山村店)」·「양평다가(楊坪多稼)」·「유시장림(柳市長林)」·「수교심춘(繡郊尋春)」·「원탄조어(院灘釣魚)」'의 소제목이 붙어 있다. 김인후가 「칠계십영」이라는 시제(詩題)로 먼저 지은 후, 임억령이 「풍영정차김하서운(風詠亭次金河西韻)」, 이황이 「차운김후지위김계진작칠계십영(次韻金厚之爲金季珍作漆溪十詠)」이라는 제목으로 차운하였다. 「칠계십영」은 자연의 조화가 구현되는 유가적 이상세계로서 풍영정과 주변 승경을 예찬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에 은거하며 안분지족의 삶을 살고자 했던 김언거의 신념을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광주의 근대 시기 누정]
누정의 건립 규모나 누정제영 제작 편수를 살펴보면 근대 시기에 가장 많은 분포가 나타난다. 근대 들어 광주 지역이 호남의 문화적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이 시기 누정문학 또한 광주의 누정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20세기 초에도 누정이 당대 지식인들의 중요한 문화적 교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근대 시기에 건립된 누정 중 대규모 누정제영이 남아 있는 곳으로 연파정(蓮坡亭)과 하은정(荷隱亭)을 들 수 있다. 두 곳 모두 광주광역시 북구 매곡동 김용학가옥 후원에 자리하고 있다.
연파정은 1918년 김용학의 부친 김희수(金喜洙)가 조부 김영덕(金永德)을 기리기 위해 지은 누정이며, 하은정은 1934년 김용학이 부친 김희수를 위해 창건한 곳으로서 ‘하은’은 김희수의 호이다. 두 누정에서는 방대한 양의 누정제영이 제작되었는데, 연파정에 450여 수, 하은정에 340여 수의 제영시가 전하고 있다. 연파정 제영시는 광주 지역 누정제영 중 가장 많은 분량으로, 짧은 시간에 다양하고 많은 문인들의 시적 교유와 작시(作詩)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연파정과 하은정에 누정제영을 남긴 문인들 중에는 고광선(高光善)·기동준(奇東準)과 같이 근대 시기 유학자이거나 항일지사들이 많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