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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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水源池 |
영어공식명칭 | Catchment Area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윤희철 |
[정의]
광주광역시 시민에게 물을 공급하는 상수도의 원천.
[개설]
도시에 깨끗하고 맑은 물을 공급하는 것은 근현대 역사 속에서 도시 정부의 중요한 책무였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도시 주변에 맑은 물을 확보하는 것이며, 도시 주변 양질의 수원지는 도시 성장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변천]
광주는 1917년 7월 광주수도 기공식을 열었고, 1920년 5월 30일 제1수원지 통수식이 열렸다. 전국 15번째 통수로였다. 첫 수원지는 지한면 운림리[지금의 동구 운림동]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자리하였다. 당시 상수도 공급은 광주 지역에 사는 일본인들을 위한 것으로 전라남도와 광주면 주관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기록을 보면, 상수도가 도입되기 이전 광주 지역 음용수는 대부분 우물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수인성 전염병 등을 우려한 일본인들의 요구가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최초 급수 구역은 일본인들에 의해 준공된 만큼 대다수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충장로 일대였다.
1960~1970년대 경제 성장기 인구 증가는 심각한 단수 문제를 일으켰다. 1936년에 1966년 추정 인구가 15만 명이었으나, 실제 광주시 인구는 이미 30만 명을 넘어섰다. 물 부족 현상에 더해 수도요금은 해마다 10~20%씩 올랐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7년 북구 동림동 일대 극락강 산동교 중류에 흐르는 물을 막아 제3수원지가 준공되었고, 1962년에는 북구 무등산 자락 청옥동 계곡에 제4수원지가 생겼다. 하지만 격일제 또는 3일제의 제한 급수가 계속되었다.
1971년 준공된 동복수원지는 무제한 급수를 가능하게 하였다. 당시 광주시장은 동복수원지 통수식에서 "일본인들이 계획만 하고 말았던 일을 우리 힘으로 해냈으며 6일제 급수, 차량 급수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며 감격스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 내내 광주시 평균 급수율은 52~73%에 그쳤다.
1985년 6월 완공된 동복수원지 확장 공사는 광주시의 급수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처방이 되었지만, 화순의 지역 주민들은 정든 마을이 수몰되어 떠나야 하는 역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때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화순 적벽(赤壁)도 상당 부분 물에 잠겼다.
[현황]
광주광역시에는 2021년 기준 동복수원지, 제2수원지, 제4수원지, 주암호의 4개 수원지가 있다
저수용량은 동복수원지 9,953만㎥, 제2수원지 53만㎥, 제4수원지 190만㎥, 주암호 4억 5700만㎥이며, 유효 저수량은 동복수원지 9,200만㎥, 제2수원지 50만㎥, 제4수원지 184만㎥, 주암호 3억 5200만㎥이다.
상수 생산시설은 동복수원지 36만㎥, 제2수원지 2만㎥, 제4수원지 2만㎥, 주암호 44만㎥이며, 유역 면적은 동복수원지 189㎢, 제2수원지 4.6㎢, 제4수원지 13.4㎢, 주암호 1,01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