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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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昌煥 |
영어공식명칭 | Kim Changhwa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명진 |
출생 시기/일시 | 1854년 - 김창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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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27년 - 김창환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7년 - 김창환 김창환협률사 조직 |
출생지 | 대산동 - 전라남도 나주군 삼도면[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 |
묘소 | 김창환 묘 -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 |
성격 | 판소리 명창 |
성별 | 남 |
본관 | 김해 |
대표 경력 | 김창환협률사 활동 |
[정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 판소리를 뿌리내리고 지역 창자들을 규합한 판소리 명창.
[개설]
김창환(金昌煥)[1854~1927]은 전라남도 나주군 삼도면[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에서 출생하였고 묘소도 마을에 있다. 김창환은 집안 내림에 의하여 무업을 승계하는 세습무계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친인척 중에 판소리 명창들도 상당수 있다. 서편제 명창 이날치(李捺致)[1820~1892]를 비롯해 박기홍과 이종 간이며, 광주광역시 광산구 출신 임방울(林芳蔚)[1904~1961]이 외조카가 된다.
[활동 사항]
김창환은 어린 시절 이날치에게 소리를 배웠다. 이날치는 서편제 시조라고 불리는 박유전(朴裕全)[1835~1906]의 제자이다. 이후 박유전의 또 다른 제자인 정창업(丁昌業)[1847~1889]에게 여러 해 소리를 배워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정창업 역시 서편제 판소리 전승자이며, 정광수의 조부이다. 즉, 김창환은 전통적인 서편제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명창이라고 할 수 있다.
김창환은 1902년 궁내부 협률사 주석으로 발탁될 만큼 역량이 뛰어났고, 오늘날에는 근대 5명창으로 꼽히는 등 당대의 최고 명창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김창환에 대해 “제작(製作)도 능(能)하거니와 몸짓이 창(唱)보다 더욱 능(能)하다. 잘난 풍채(風采)로 우왕좌래(右往左來)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이 모두 미묘(美妙)치 아니한 것이 없다.”라고 한 바 있다. 이는 김창환이 특히 발림의 능력이 뛰어난 명창이었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이다.
김창환은 궁내부 관할 협률사에서 활동하다가 1906년 협률사가 폐지된 후 전라남도 광주로 낙향하여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해 활동하였는데, 김창환협률사는 광주·전남 출신 명창·명인들 약 5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조직이었다. 이외에도 1910년대에는 경성구파배우조합, 1930년대에는 조선음률협회, 조선악정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김창환은 일제강점기에 뿔뿔이 흩어졌던 광주·전남 지역의 명창·명인을 규합한 인물이다. 특히 김창환협률사는 일제강점기 남도 지방 창극단 형성의 첫 출발점이었고, 광주 지역에 판소리 서편제를 뿌리내리고 널리 알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묘소]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