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3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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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武夷里武夷洞祭 |
영어의미역 | Mui Village Ritual in Mui-ri |
이칭/별칭 | 산제,산지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무이리 무이마을 |
집필자 | 석대권 |
성격 | 민간신앙|마을신앙|마을 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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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시기/일시 | 1월 14일(음력) 자정 |
의례장소 | 원통산|마을입구 |
신당/신체 | 위하는 나무 |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무이리 무이마을에서 음력 1월 14일 자정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무이리(武夷里)는 600여 년 전에 원통산(怨痛山)의 약수터에서 매년 동일한 수량이 흘러내리기 때문에 수동(水洞, 물골)이라 하였고, 그 후 마을의 경치가 너무 좋아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무이구곡(武夷九谷)에 비유된다고 하여 지어진 마을명이다. 무이리 무이마을 동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자정에 마을의 수호신이 기거하고 있다는 소나무를 당목으로 삼아 한 해 동안 마을 사람들의 평안과 농사의 풍요를 빌며 지내는 마을 공동의 제사이다. 이를 ‘산제’ 또는 ‘산지’라고도 부른다.
[연원 및 변천]
무이리는 1400년 즈음에 연안전씨(延安田氏)가 터를 잡았으니, 동제는 마을 역사와 같이 오래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에 동장의 주도로 중단되어 제당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또한 ‘산지’의 제관으로 참여한 경험이 있는 생존자는 없고, 다만 연로한 마을 어르신들이 희미하게 ‘산지’를 기억할 따름이다.
원통산의 ‘위하는 나무’는 산제가 폐지된 후 저절로 쓰러졌으며, 쓰러질 때 이 마을 출신 전좌명 효자 정려각을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하당의 경우는 나무를 베어 낸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무이리 마을 뒤에 있는 원통산의 당목에서 지내는 상당과 마을입구의 ‘위하는 나무’인 하당 2군데서 지냈다.
[절차]
매년 정월 초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제관을 선출한다. 제관은 부정하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 선출된다. 상을 당하지 않았거나 혹은 집에 임신한 여자가 없어야 한다. 또한 가축이 새끼를 배어도 제관이 될 수 없다. 제관으로 선출된 사람은 그때부터 외부 출입을 삼가면서 온 정성을 들인다. 집에서 기도를 하면서 금줄을 만들고 제물을 준비한다.
12일이 되면 제관은 제물을 장만하러 장에 가는데, 부정한 것을 피하기 위해 새벽 일찍 출발한다. 장에 도착하면 필요한 물건을 사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제물은 가장 좋은 것으로 고르고 물건 값은 깎지 않는다.
13일부터는 마을 전체가 금기에 들어간다. 비린 것을 금지하고 쇳소리 또한 내지 못하게 한다. 제관은 마을로 통하는 세 고개(버무고개·서당고개·아래고개)에 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당과 자신의 집에도 금줄을 친다. 골안에서 황토를 가져와 금줄을 친 곳에 뿌린다. “(제관이)제사 잡수러 올라 갈 적엔 암만(아무리) 차바도(추워도), 얼음물에 머리를 감아도 안 춥드랍니다.”라며 그 영험함을 전해 준다.
14일 오후부터 제관 집에서 제물을 장만한다. 제물 장만에 필요한 재료는 방아를 따로 찧어야 했다. 가장 중요한 제물은 떡이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제관은 제물을 들고 먼저 원통산에 있는 ‘위하는 나무’로 향한다. 그 곳에서 가져 온 제물을 차려 놓고 제를 지낸다. 제를 마치면 제물을 모아 마을 입구로 향한다.
마을 입구의 하당에서 제를 지내면 모두 마치게 된다. 제를 마친 후 제관은 간단히 음복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다음날 있을 동네 음복을 준비한다. 산제의 정성이 부족하면, 즉 제수가 깨끗하지 않으면 어떤 짐승이 나타나 흙을 퍼붓는 불길한 징조를 보였다고 한다.
[부대행사]
무이리 무이마을 동제가 끝나고 닭이 울면 주민들은 ‘정월밥’을 해 먹고, 제관의 집에 모여 음복을 하며 마을회의를 열었다. 회의를 마친 후 풍물로 지신밟기를 하고 줄다리기를 하였다. 산제를 지낼 때에는 ‘기우(금기)’ 관행이 있었다. 제관이 기우하는데 정성이 부족하면 ‘장손을 데려 간다(죽는다)’고 하며, 온 동민이 사흘 동안 기우를 하였다고 한다. 마을 노인들은 “기우하는데 힘들고 하니 ‘동사(동제)’를 잘 없앴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