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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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薰 |
영어음역 | Heo Hun |
이칭/별칭 | 허도문,방산(舫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용만 |
성격 | 학자|의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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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
성별 | 남 |
생년 | 1836년 |
몰년 | 1907년 |
본관 | 김해 |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학자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김해. 호는 방산(舫山). 도학문장(道學文章)으로서의 기대 때문에 아명(兒名)을 허도문(許道文)이라 했다. 불고헌 허돈(許暾)이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 옮겨 살면서 세칭 임은허씨로 불리워졌다. 청추헌 허조(許祚)의 장자로 태어나 백부 허정(許柾)의 양자로 들어갔다.
[활동사항]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해 위암 장지연(張志淵)이 편지를 보내 지금의 난국에 관중과 제갈량이 되어 주기를 간청하자, 허훈은 토지 3,000 두락을 팔아 두 아우인 성산 허겸과 왕산 허위(許蔿)의 의병 활동 자금으로 쾌히 내어주고 청송 비봉산 아래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남덕정(覽德亭)을 짓고 살면서 동생들에게 “진심갈력하여 위난할 때 보국하라”라고 편지로 독려했다. 청송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학문과 사상]
허훈은 29세에 허전(許傳)의 집지문인(執贄門人)이 되었는데, 허전은 이익-안정복-황덕길로 이어진 성호학파의 실학을 이은 인물이고 허훈은 허전의 학통을 이었다. 박학다식하고 문장으로도 당대에 이름난 허훈은 「사칠관견(四七管見)」과 「심설(心說)」에서 이이(李珥)의 성리설이 이황(李滉)의 견해와 다른 문제들을 비판하였고, 이황의 학문적 정통성을 재천명하고 계승하였다.
[저술 및 작품]
허훈의 성리설에 관한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은 「심설」과 「사칠관견」이며, 실학과 유관한 글로는 「염설(鹽說)」·「포설(砲說)」·「차설(車說)」·「패수설(浿水說)」·「해조설(海潮說)」 등이 있다. 문집으로 『방산집(舫山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