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325 |
---|---|
한자 | 壬辰倭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나각순 |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 이 서울특별시 강남구를 포함한 조선을 침략한 전쟁.
[개설]
임진왜란 은 1592년 4월 일본군이 수십만 대군으로 한반도 전역을 침략하여 7년간 벌어진 전쟁으로, 급기야 조선·일본·명이 참전한 국제 전쟁이 되었다. 임진왜란의 결과, 일본과 명은 정권이 교체되고, 조선은 예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질서가 더욱 확고해졌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으로 국토가 유린될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선조 이전부터였다. 정치적으로는 4대 사화와 훈구·사림 세력 간 정쟁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일본에서는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그는 대마도주(對馬島主)를 사신으로 보내어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보빙을 겸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으로 이루어진 통신사 일행이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사행에서 돌아와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반하여,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이에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을 좇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 또 선위사 오억령(吳億齡)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 사신 겐소 등에게 “일본은 다음해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 일본의 발병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가 도리어 파직을 당하였다. 또 겐소 등이 그를 위문하는 황윤길과 김성일 등에게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入貢)을 거절한 것을 도요토미가 분개하여 군사를 일으키고자 하니,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하여 일본의 공로(貢路)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할 것”이라 했으나 이것 역시 거절하였다.
그 뒤 왜관에 머무르던 일본인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고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경상감사·전라감사·충청감사로 하여금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신립(申砬)을 경기·황해도에, 이일(李鎰)을 충청·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 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만이 전비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을 정비하고,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전력하고 있었다.
[경과]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침입할 당시 총병력은 30여 만 명으로서, 출정 병력을 제외한 군대는 나고야에 약 10만 명을 머무르게 하고 3만 명으로 교토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1592년 4월 14일에 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 병선 700여 척이 부산포를 침입하였다. 이어 적군이 파죽시세로 올라오자 국왕 일행이 몽진길에 오르면서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하여 도성을 수비하게 하고,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진을 중심으로 한강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강을 수비하던 김명원은 적이 쏜 탄환이 지휘본부 제천정(濟川亭)에 떨어지자 한강 수비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임진강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제천정은 강남구 사평나루의 맞은편에 용산구 보광동·주성동 강변에 있던 정자로 한강진 인근에 있었다. 따라서 임진왜란 때 왜군이 사평나루와 한강진을 잇는 부교(浮橋)를 만들어 한강을 건너 한양도성을 침략해 왔던 것이다. 이때 서강군(西江軍)을 비롯한 의병들이 부교를 파괴하여 왜군의 작전을 교란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도대장 이양원이 도성 수비를 포기하고 임금의 뒤를 좇아가게 되자 왜적들은 무혈입성하게 되었으니, 고니시 군사가 동대문을 들어온 것은 5월 2일이었고, 가토 군사는 다음 날에 남대문으로 들어왔다. 이후 왜적은 평양성까지 점령하였으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 패배하여 다시 서울 도성 지역으로 내려와 진을 치게 되었다. 이때 마침 전라감사 권율(權慄)이 명군과 함께 도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진하던 중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이르러 배수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치게 되니 1593년 2월 12일이었다. 권율·처영 등은 휘하 군을 지휘하여 격전 끝에 그들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1년 가까이 왜군이 한반도를 유린하고 한양도성에 진을 치고 있는 사이에 강남구 지역은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즉 조선 왕릉인 선릉과 정릉이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1593년에 왜군에 의해 파헤쳐지고 재궁(梓宮)[왕과 왕비의 관]이 불타는 수난을 겪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왕릉 능원 내의 커다란 나무 두 그루만 뽑아도 나라 밖으로 추방시키는 엄한 죄를 물었다. 하물며 왕릉을 훼손하였으니, 왜군과 결탁한 백운기(白雲起)라는 자의 중죄는 비할 바 없이 큰 것이었다. 나아가 성리학의 덕목인 충효를 정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 왕실의 불효는 국가통치의 정통성을 잃게 하는 사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릉과 정릉의 원찰이었던 봉은사 또한 이때 불에 타고 말았으며, 1637년(인조 15)에 선화(禪華) 경림선사(敬林禪師)에 의해 중창되었다.
한편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명나라에 원군을 청함에 마침 병부상서로 있던 석성(石星)이 많은 원군을 보내어 실지 회복과 사직 보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는 강남구 청담동 출신 홍순언(洪純彦)이 선조 때 한어(漢語) 통역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을 때 청루(靑樓)에 나온 소복 여인을 구해주고 돌아왔는데, 1584년(선조 17)에 다시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 황정욱(黃廷彧)을 따라갔다가, 당시 명의 예부시랑 석성의 부인이 된 예전 소복 여인을 만나게 된 인연에서 힘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결과]
전후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명과 일본은 정권이 바뀌고 조선은 예론에 의한 통치체제로 변하는 등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특히 전쟁터가 되었던 조선에서는 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농경지가 황폐화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군공이나 납속으로 서얼허통, 향리의 무반직 진출,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져갔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한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강남구 일대도 왕권의 상징이었던 왕릉이 왜적에게 도굴당하고, 원찰이 불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