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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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海院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현욱 |
[정의]
조선 시대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설치된 숙박 시설.
[개설]
덕해원(德海院)은 도성에서 함경도 및 경기 북부로 이어지는 대로상에 위치하던 원우(院宇)이다. 조선 전기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누원(樓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덕해원이 설치된 정확한 시기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조선 개국 초에 원의 설치를 건의하는 도평의사사의 상소를 통해 조선 초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초 기록에 덕해원 관련 자료가 있다.
[관련 기록]
조선 초 명신 변계량(卞季良)[1369~1430]의 『춘정집 추보(春亭集追補)』에는 「양주 해촌 덕해원 조성 연화문[楊州海村德海院造成緣化文]」이 실려 있다. 『사가 시집 보유(四佳詩集補遺)』에는 역시 조선 전기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시 「양주 덕해원(楊州德海院)」이 실려 있다. 또한 성종 대 좌의정을 지낸 신용개(申用漑)[1463~1519]의 문집 『이요정집(二樂亭集)』에는 「제 양주 덕해원 벽상(題楊州德海院壁上)」이 수록되어 있다. 「양주 해촌 덕해원 조성 연화문」에 의하면 “도봉산 아래/ 해촌이란 등성이 있는데/ 도성에서 겨우 한 번 쉴 거리라서/ 행인이 다투어 분주히 이른다”라고 하여 이곳이 사람의 출입이 번다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내용]
덕해원은 조선 시대 도성에서 함경도 및 경기도 북부 지역으로 이어지는 대로에 위치한 일종의 공용 숙박 시설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확한 설치 시기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조선 초에 이미 덕해원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은 공무상 여행 중인 관원, 수령의 여정에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치되었고, 그 외에도 사적 여행자들에게도 동일한 기능을 제공하였다.
[변천]
조선 전기에 설치된 덕해원은 후대에 들어 누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임진왜란 직후 향화인(向化人)[야인(野人)·왜인(倭人)으로서 투화(投化)해 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누원이 거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누원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원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곳으로 동북방에서 도성으로 유입되던 물산의 집결지가 된다. 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누원점(樓院店)이라는 장시(場市)가 형성되었고 도성의 시전(市廛)과 경쟁하는 대표적인 곳으로 성장한다. 누원점의 상업적 번영은 조정에서도 충분히 인식하여 관리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덕해원은 조선 전기의 원으로 조선 후기 상업이 크게 발전하였던 누원점의 전신(前身)에 해당한다. 이른 시기에 원이 설치된 것으로, 이 지역이 교통로의 요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