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734 |
---|---|
한자 | 南區- 文化遺産 |
영어공식명칭 | Cultural Heritages in Nam-g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남구 |
시대 |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 |
집필자 | 배성혁 |
[정의]
대구광역시 남구에서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전하여 오는 주요 문화유산.
[개설]
대구광역시 남구의 문화유산을 문화재·유적 위주로 살펴보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3점, 국가등록문화재 1건이 있으며, 대구광역시 지정 문화재로는 유형문화재 6점, 무형문화재 1건, 기념물 1건, 문화재자료 1건이 있어, 모두 13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그 밖에도 비지정문화재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와 취락, 삼국시대의 고분군과 산성,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이후의 산성과 사찰, 생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남구의 지정문화재]
먼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는 초창기 한글 창제 및 불교학·서지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인 선종영가집 언해(禪宗永嘉集諺解)[보물 제774-3호, 2017년 8월 31일 지정], 1457년에 금속활자[초주갑인자]로 간인한 원간본 불교 서적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보물 제1713호, 2011년 4월 29일 지정], 18세기에 직지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수화승 세관(世冠)이 1741년에 조성한 대구 서봉사 지장시왕도(大邱瑞鳳寺地藏十王圖)[보물 제1856호, 2015년 3월 4일 지정]가 있다. 국가등록문화재로는 대구 지역 최초의 수도시설 가운데 하나이며 일제강점기인 1918년에 건립된 대구 대봉배수지(大邱大鳳配水池)[국가등록문화재 제251호, 2006년 6월 19일 지정]가 있다. 참고로,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국보, 보물, 유형문화재 등 지정문화재와 등록문화재의 지정 번호가 모두 삭제되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는 조선시대 서예가인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필적을 1650년(효종 1) 목활자로 간행한 책이자 조선 후기의 한자음 변천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천자문(千字文)[유형문화재 제69호, 2013년 10월 30일 지정], 상호나 착의법 등에서 17세기 후반 목조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대구 안일사 목조석가여래좌상(大邱安逸寺木造釋迦如來坐像)[유형문화재 제71호, 2015년 5월 11일 지정],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 18세기 초반 목조불상의 제작 방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 대구 은적사 목조석가여래좌상(大邱隱跡寺木造釋迦如來坐像)[유형문화재 제72호, 2015년 5월 11일 지정], 조선 전기에 간행된 금속활자본 『비아(埤雅)』·『이아주소(爾雅註疏)』를 포함하여 『퇴도선생일기(退陶先生日記)』, 『전 학봉 시고(傳鶴峰詩稿)』 등의 전적들을 묶은 이수충가 소장 전적(李秀忠家 所藏 典籍)[유형문화재 제81호, 2017년 1월 31일 지정], 고려 후기인 14세기에 『화엄경(華嚴經)』을 필사한 사경(寫經)으로 추정되는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주본(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 周本) 권22[유형문화재 제90호, 2020년 2월 10일 지정]가 있다.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로는 동초제 판소리 「흥보가」의 맥을 이어 가는 이명희 명창과 동초제 판소리 「심청가」의 맥을 이어 가는 주운숙 명창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판소리[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1992년 9월 8일 지정]가 있다. 대구광역시 기념물로는 ‘앞산산성’이라고도 불리며 통일신라 때 대덕산 정상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포곡식 산성인 대덕산성(大德山城)[대구광역시 기념물 제7호, 1988년 5월 30일 지정]가 있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는 법장사삼층석탑(法藏寺 三層石塔)[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 1982년 3월 4일 지정]가 있다.
[남구의 비지정문화재]
문헌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남구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로는 지표 조사와 10여 차례 진행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소개된 유적들이 있다. 신석기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생활 유적들이 대부분인데, 그중에서도 청동기시대 분묘와 생활 유적, 조선시대 대구읍성 내의 건물터가 주류를 차지한다.
남구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대구 이천동 고인돌 ①~⑤를 통하여 살펴보면 청동기시대 이전임이 분명하다. 더불어 신천의 동쪽으로 잇닿아 있는 수성구 상동과 하류인 중구 대봉동, 북구 검단동 등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점으로 미루어 늦어도 신석기시대부터는 남구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모두 이천동 일대에서 분묘와 생활 유적이 조사되었다. 이천동 고인돌[297-1번지]은 과거 대봉동 고인돌로 보고되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36년 조사된 것을 1990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재발굴한 것이다. 2개 지점 중 Ⅰ고인돌에서는 5기, Ⅲ고인돌에서는 4기, 그리고 서쪽에서 2기의 돌널무덤과 돌덧널무덤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간돌화살촉 11점, 대롱옥 44점이 출토되었다. 이천동 고인돌[297-1번지]은 1993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이 발굴하고 2004년 대봉동 고인돌Ⅱ로 보고된 유적이다. 고인돌의 하부구조로 보이는 석곽 5기가 조사되었고 간돌칼 1점과 간돌화살촉 7점이 출토되었다. 이천동 고인돌[283-6번지]은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영남대학교 박물관이 발굴하고 2002년 대구 이천동 고인돌로 보고되었다. 고인돌 1기와 돌덧널무덤 10기가 조사되었고, 내부에서는 다수의 화살촉과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천동 295-7유적은 ‘이천동한마음주택 재건축 부지’에 대하여 2020년 금오문화재연구원이 발굴하여 돌널무덤 2기, 집터 6동, 수혈(竪穴) 2기, 구하도(舊河道) 1기 등이 조사되었다. 이천동 308-10유적은 대구도시철도 3호선[이천동 구간]의 교각 2개 지점에 대하여 2010년 영남문화재연구원이 발굴하여 돌널무덤 3기가 조사되었다.
초기 철기시대 유적은 이천동 295-7유적에서 집터 3동, 구상유구(溝狀遺構) 2기가 조사되고 덧띠토기가 출토되어 남구에도 초기 철기시대 문화가 전개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초기국가시대 유적은 이천동 대구중학교 교정에서 기원전 1세기 대의 세형동검이 출토된 바 있으며, 대명동 1858-4유적에서는 기원후 2세 말 유적으로 보이는 나무덧널무덤 3기, 독무덤 1기, 수혈 1기가 조사된 바 있다.
삼국시대 유적은 대명동 고분군과 용두산성이 알려져 있다. 대명동 고분군은 현재 영남대학교병원, 대구교육대학교,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 대구광역시 상수도사업본부로 연결되는 능선 일대에 대형 봉토분이 분포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38년 조사된 후로는 도시화로 말미암아 완전히 소멸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남구릉’과 ‘북구릉’으로 구분된 고분군 일대에 약 40여 기의 봉토분이 남아 있었으며, 이 중에서 남구릉 고분군의 1호와 2호, 북구릉 고분군의 2호와 7호가 조사되고, 긴목항아리, 굽다리접시류, 고리자루큰칼, 금제 귀고리, 토기 조각, 도자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최근 고분군의 자락에 있는 대명동 1858-4유적에서는 도심화로 말미암아 많이 훼손되었음에도 삼국시대 나무덧널무덤 12기, 돌덧널무덤 21기, 암광묘(岩壙墓) 6기, 도랑[주구(周溝)] 1기가 조사되고, 5~6세기 대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용두토성으로도 불리는 용두산성은 산성산[653.4m]에서 신천을 따라 북으로 길게 뻗은 산맥의 하단부에 있는데, 용두산성이 있는 곳은 대구에서 팔조령을 넘어 경상북도 청도군으로 가는 긴 계곡의 입구에 있는 요충지이다. 흙과 돌을 섞어 쌓은 토석혼축(土石混築)으로 이루어진 테뫼식[산정식(山頂式)]의 산성이며 규모는 남북 길이 약 150m, 최대폭 약 50m이며, 둘레 약 400m이다. 축조 시기는 과거 김해식 토기가 확인되어 삼국시대로 보고된 바 있지만, 2017년 조사에서는 통일신라와 고려의 토기 조각만 확인되었다.
통일신라 때 유적으로는 산성과 사찰, 생활 유구가 알려져 있다. 대덕산성, 대구 법장사삼층석탑 같은 지정문화재 외에도 봉덕동 1017-8 유적에서 통일신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집터 1기와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려시대 유적은 남북국시대 통일 과정에서 후백제와 고려가 부딪치는 과정에서 일어난 927년(고려 태조 10)의 공산전투 이후 왕건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이 대부분이다. 대명동 왕굴은 왕건이 피신한 전설이 전하여지고, 비파산(琵琶山) 동쪽의 은적사(隱跡寺)는 왕건이 은신한 장소로 936년(고려 태조 18)에 승려 영조가 창건하였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또한 비파산 서북쪽의 안일암(安逸庵)은 왕건이 편안히 쉬어간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고, 앞산의 안지랑골에는 왕건이 물을 마셨다는 왕정(王井)이 남아 있으며 왕정의 물을 ‘장군수(將軍水)’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의 유적은 대명동 산278-2번지 일대의 대명동 유물산포지, 이천동 439-1번지 일대의 이천동 유물산포지 등 유물산포지 2개소가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의 유적은 대구 대봉배수지가 알려져 있는데, 1호 배수지[1918년 건립]와 2호 배수지[1925년 건립]가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