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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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地戰鬪 |
영어의미역 | 328 High Ground Battl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포남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성격 |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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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50년 8월 13일 |
종결연도/일시 | 1950년 8월 24일 |
[정의]
1950년 8월 14일부터 30일까지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포남리 일원에서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와 북한군 제3사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
[개설]
328고지는 왜관 북쪽 5㎞지점 석적면 청남리에 있는 바위산이다. 낙동강 건너편 약목(若木) 일대를 향해 횡격실(橫隔室)을 이루고 있어 방어에 유리하며, 고지에서 동으로는 ‘465고지[岐般山]~714고지[白雲山]’ 능선을 타고 사단 후방 지역으로, 남으로는 303고지[작오산]를 거쳐 왜관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발단]
1950년 8월 13일 북한군은 왜관 남쪽 기산면 노석리에서 도하를 시도하고 있던 제3사단 병력을 328고지 쪽으로 돌려 집중 공격하였다. 8월 12일 밤에 국군 제15연대는 연대 지휘소를 매남[석적읍 도개리]에 설치하고, 동명에서 부대 정비 중이던 제1대대를 포남리에 위치한 328고지에 배정하고, 154고지를 방어 중이던 제3대대를 반계리에 위치한 270고지에 배정하였다. 국군의 방어선 변경으로 인한 틈을 노려 북한군은 154고지를 차지하여 전진기지로 삼았다.
[경과]
8월 14일 1시 무렵 북한군은 1개 연대 병력으로 북삼면 오평리[현 북삼읍 오평리] 마진(馬津)나루터의 수중 가도를 도하하여 328고지로 접근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국군은 고지 후사면(後斜面)으로 철수하였고, 북한군은 인접한 3대대의 270고지까지 점령하였다. 날이 밝아지자 국군 제1·3대대는 북한군의 병력이 증원되기 전에 역습을 시도하여 오전 8시 무렵 고지를 다시 탈환하고 고지의 전사면(前斜面) 7~8부 능선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국군은 낙동강 건너편에서 북한군을 지원하는 집중 포격이 가해지자 포격을 피해 고지의 후사면으로 철수한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465고지[岐般山]로 철수하였다. 국군 제15연대는 철수와 동시에 특공대를 328고지 뒤쪽으로 침투시켜 두었다.
8월 15일 새벽 국군 제15연대 제1·3대대는 특공대와 함께 협공해 들어가 제1대대는 328고지, 제3대대는 270고지를 탈환하였다. 오후 4시 무렵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강 건너 언덕의 북한군을 제압하였고, 328고지에는 네이팜탄에 의한 북한군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이날 밤 11시 무렵 국군은 북한군의 재공격을 막다가 제1대대는 망정리로 후퇴하고, 270고지의 제3대대는 465고지로 철수하였다. 8월 16일 국군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하였고, 미 공군은 B-29로 북한군에 대한 융단폭격을 가해 북한군의 움직임을 크게 둔화시켰다. 그렇지만 북한군의 공격은 8월 17일에도 계속되었고, 8월 24일까지 피아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 8월 23일 국군 제1대대는 미군 105밀리 곡사포의 지원 포격을 받으면서 다시 역습하여 270고지·328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결과]
8월 24일 새벽 국군 제1·3대대는 여세를 몰아 154고지를 협공하자 북한군이 154고지를 버리고 369고지로 도주하였다. 북한군에서 서울을 점령한 공을 찬양받아 ‘서울사단’이라 불리던 북한군 제3사단은 제15연대에 의해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328고지 전투는 고지의 정상이 15번이나 바뀔 정도로 지극히 치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