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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2006
한자 卞榮晩
영어음역 Byeon Yeongman
이칭/별칭 변씨삼절(卞氏三絶)·삼변(三卞)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추교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률가
출신지 경기도 부천군
성별
생년 1889년연표보기
몰년 1954년연표보기
본관 밀양

[정의]

일제강점기 활동한 부천 지역 출신의 법률가.

[개설]

중국 북송시대 문장가이며 정치가였던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 삼부자를 일컬어 삼소(三蘇)라고 했는데, 변영만(卞榮晩)[1889~1954]·변영태(卞榮泰)·변영로(卞榮魯) 삼형제도 그와 비견되는 천재성을 가진 명문장이란 의미에서 ‘한국의 3소(三蘇)·변씨삼절(卞氏三絶)·삼변(三卞)’으로 불렸다. 국어학자인 이희승은 이들 삼형제를 가리켜 “변문(卞門)에는 별 셋이 있어/ 별마다 뚜렷하여/ 다 같이 별이로되/ 빛은 또한 각각이로다”라고 하였다. 이들 형제는 모두가 문학과 어학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고 천재적인 풍모를 지녀 숱한 일화를 낳았고, 창씨개명 정책에 저항하여 끝까지 이름을 바꾸지 않아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후반에 삼형제 모두 고향인 부천군 고강리로 내려와 은둔하였다.

특히 변영만에게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문장대가’, ‘한문고전을 기반으로 서양의 문학과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여 독특한 정신세계를 개척’, ‘식민지 시대에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적 지성’, ‘조선의 천재’, ‘회색 괴짜’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활동사항]

산강재(山康齋)·삼청(三淸)·곡명(曲明)·백민거사(白旻居士) 등의 호를 사용한 변영만은 1889년(고종 26) 6월 23일 부천군 하오정면 고리동 313번지에서 태어났다[서울 다동(茶洞)이란 설도 있다]. 부친 변정상이 관직에 있던 관계로 변영만 일가는 서울 가회동에 거주하였다. 1906년 호적대장에는 할머니를 비롯해 변정상 부부와 변영만·변영태 부부, 변영복[영로]과 하인 2명이 거주하였고, 집의 규모는 초가 13칸이었던 것으로 보아, 풍족할 살림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부친과 가까웠던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1855~1907]의 문하에서 상당 기간 한학을 배웠고, 이때 같은 문하에 있던 단재 신채호와 10년이 넘는 연령 차이에도 불구하고 깊은 교분을 나누었고, 변영만의 현실 인식과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5세가 되던 해 이철자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1905년에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1906년 1월 14일 제4회로 졸업하고, 이어서 그 해 3월 22일자로 법관양성소 판임관 8급의 박사에 임명되었고, 2월에는 보다 새롭고 본격적인 법학 교육을 받기 위하여 당시 유일의 법학 전문 사립 기관이었던 보성전문학교 법률야학과에 입학하여 1908년 1월 29일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1908년 7월 4일 경성지방재판소 서기, 12월 17일 목포재판소 판사에 임명되었지만, 채 1년이 안 되어 사직하였다. 아마도 일제에게 사법권마저 빼앗기게 되자 사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1910년 1월 서울 중부 황토현 23통 3호에서 사무실을 개업하고 변호사의 길을 걸었으며, 모교인 보성전문학교 법률학 강사로 활동하면서 저술에 치중하였다. 그 무렵 『세계삼괴물』(1908)과 『20세기의 참극 제국주의』 등 제국주의와 일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서적을 번안하며, 당대 지식계에 엄청난 화두를 던졌다.

1911년 가을 중국을 다녀온 후 망명 준비를 하였고, 1912년 국경인 신의주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었다. 당시 1910~1911년에 신민회 계열의 인사들은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망명을 시도하였는데, 변영만은 신의주에서 중국과 국내를 연결하려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동생인 변영태이시영을 따라 만주 신흥강습소에서 군사 훈련을 마치고 중국에 머물고 있었다.

결국 1913년 후반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는 망명 이유를 국권 피탈 후 정치적 현실에 대한 불만과 중국 문화에 대한 관심 등을 들었다. 중국 망명 후 북경에서 짧은 기간 위안스카이[袁世凱] 정권의 총통부에서 근무하였고, 1914~1917년까지 중국신문사인 황종일보사(黃鍾日報社), 북경일일신보사(北京日日新報社)에서 근무하였다. 이 당시 서구 문물의 수용보다 국수주의적 전통을 강조한 중국학자 종빙린[章炳麟]을 접하게 되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917년 유럽으로 가기 위해 싱가포르에서 홍명희(洪命憙)·정원택(鄭元澤) 등과 만났지만, 1차 세계대전 와중에 포기하고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1918~1919년 무렵에 귀국하여 한동안 경성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기도 하였고, 한학과 영문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보성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불교전문학교 등에서 한학을 강의하였고, 1920년대에 『동명』, 1930년대에 『동아일보』 등에 글을 발표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 지방의 사찰과 여동생 집 등을 전전하였으며, 그 후 동생인 변영태와 고향인 부천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보냈다. 그와 홍명희·최남선[혹은 정인보] 세 사람을 일컬어 ‘경성삼재(京城三才)’라고도 불렀는데, 최남선이 변절한 후 길에서 만나도 외면해 버릴 정도로 의절하였고, 1950년 반민족행위 특별재판위원장으로 최남선을 심리하기도 했다. 이후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동국대학교·서울대학교 등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1952년에는 사법부 법전편찬위원을 지냈다. 1954년 서울 미아리에서 눈을 감았고, 묘소는 고강동 63-7번지 밀양변씨 선산에 있다.

[저술 및 작품]

변영만이 남긴 『세계삼괴물(世界三怪物)』과 『20세기의 참극 제국주의(二十世紀之慘劇帝國主義)』두 권의 책으로 인해 한국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창시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즉 서구를 모방하며 추종하던 당대의 상식에 19세 청년 변영만의 도전으로 신채호를 비롯한 당대 독립 운동가들이 제국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어디에 구속되기를 싫어하는 자유주의자의 기질, 그러면서도 민족적 긍지와 책임감을 자신의 존엄에 일치시키고자 했던 선비 의식, 동양의 지적 전통을 확고하게 터득한 자로서 서양의 문학과 사상을 자유롭게 섭취하여 지적 융합을 제대로 이루려는 의식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런 모든 것을 바탕에 다진 위에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길을 걸어갔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세계삼괴물』, 『20세기의 참극 제국주의』외에도 『단재전』, 『산강재문초(山康齋文鈔)』 등의 저술이 있다.

또한 신문 잡지에 발표된 글로는 「혹문(或文)」[『개벽』39호, 1923. 9], 「동장병린(東章炳麟)」[『개벽』40호, 1924. 10], 「문학오강(文學五講)」[『여명』1호, 1925. 7], 「문예납잡담(文藝拉雜談)」[『문예월간(文藝月刊)』1호, 1931. 11], 「시새전(施賽傳)」[『동광(東光)』, 1932. 9], 「쥐 무서워하는 사람」[『조광(朝光)』, 1936. 6], 「어비턱띠나 우초팔종(愚草八種)」[『조광』, 1936. 8], 「손돌(孫乭)의 승천(昇天)」[『조광』, 1937. 10], 「동키호테와 산초판사」[『조광』, 1937. 10], 「법의학 대가 롬부로소의 천재론」[『조광』, 1937. 4]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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