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04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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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 |
영어의미역 | Pious Son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방기철 |
[정의]
부천 지역 출신이거나 부천에 연고가 있는 사람으로서 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하게 봉양한 자녀.
[개설]
효는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유교의 도리 중 하나로 삼국시대에 이미 고구려의 태학(太學), 신라의 국학(國學) 등의 교육기관을 통해 충과 함께 교육되었다. 삼국 간 전쟁이 계속되면서 충이 사회 윤리로 강조되었다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함께 가족 윤리로서 효도가 장려되었다. 고려시대 효 관념은 『효경(孝經)』과 『논어(論語)』 등을 배경으로 하였고, 부모가 옥에 갇혀 있거나 상중일 때 혼인이 금지된 것으로 보아 효 관념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이 완전히 정착됨에 따라 효는 정치적·사회적 관념으로 완전히 체계화되었다.
[인물]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충과 함께 효를 국민에게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전국에 걸쳐 많은 효자들이 배출되었는데, 부천 지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추(韓樞)·이진욱(李震郁)[1615~1688]·황기옥(黃基玉)[1761~1794]·박명장(朴明章) 등은 조선시대에 효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인데, 이들의 무덤은 모두 부천에 있다.
한추는 성종 대 구실아치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호장(戶長)으로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포상을 받았다. 부천시 작동에 묘가 있다. 이진욱은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문권(文權)으로, 부친이 병든 10년 동안 옷의 띠를 풀지 않았고, 위독해지자 단지하여 자신의 피를 부친의 목에 흘려 넣었다. 부친 사후에는 상을 지냄에 예를 다하여 1727년(영조 3) 천거되어 지평에 증직되었다. 묘는 부천시 여월동에 있다.
황기옥은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빈(士賓), 부친은 황인점(黃仁點), 모친은 영조의 딸인 화유옹주(和柔翁主)이다. 효행으로 이름 높아 사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묘는 부천시 작동에 있다. 박명장은 본관은 죽산, 자는 학성(學成), 호는 청암(淸菴)으로, 모친을 지성으로 섬겼고 사후 3년상을 치르는 동안 즐거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박명장을 ‘하늘에서 나온 지극한 효’라고 칭찬하였다. 묘는 부천시 역곡동에 있다.
[의의와 평가]
부천에서 효행으로 이름을 떨친 한추·이진욱·황기옥·박명장 등은 모두 양반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데 이러한 특징은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외에 평민이나 노비들 중에도 효를 행한 이들은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안타까운 점은 부천에는 효자각(孝子閣) 등의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이 부천이 효와 무관한 지역이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부천 지역은 전근대시대 지방 행정구역의 중심 지역이 아니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져 효행으로 정려된 사실이 드물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