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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응부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2051
한자 兪應孚-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집필자 이병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0년 - 「유응부 이야기」 『포천의 설화』 수록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2000년 09월 22일 - 「유응부 이야기」 이병찬이 양기성에게 채록
관련 지명 충목단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
채록지 「유응부 이야기」 -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금주 4리
성격 인물담
주요 등장 인물 유응부|어머니|유응신
모티프 유형 두 개의 본관

[정의]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에서 유응부(兪應孚)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유응부 이야기」는 포천 출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1456]에 얽힌 인물담이다. 유응부의 시호는 충목(忠穆)이고,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이다. 키가 남보다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하였으며, 씩씩하고 용감하여 활을 잘 쏘니 세종(世宗)[1397~1450]과 문종(文宗)[1414~1452]이 모두 그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현재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 소재 충목단(忠穆壇)에 모셔져 있고, 노량진의 민절 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 서원(魯雲書院), 연산의 충곡 서원(忠谷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대구의 낙빈 서원(落濱書院), 의성의 충렬사(忠烈祠), 강령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어 있다. 유응부에 대한 포천 지역민의 긍지를 보여 주는 내용이다.

[채록/수집 상황]

2000년 이근영·이병찬 등이 엮고 포천 문화원에서 간행한 『포천의 설화』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2000년 9월 22일 이병찬이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금주 4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양기성[남, 72]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내용]

유응부 선생은 기골이 장대하고 장군다운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쉬는 날이면 유응부, 유응신 형제가 모시고 나가서, 뛰어난 활 솜씨로 솔개가 날면 쏴서 어머니께 그 기쁨을 전해 드리곤 했다.

한양에 다녀오는 길이라도 산에서 짐승을 보면 잡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관직에 나아가서도 청백리로 지내다 보니 집안에 쌀은 주머니에 한 말 뿐, 문의 창호지도 다 찢어져 돗자리 거적을 치고 살았다고 한다.

가정적으로는 효자일 뿐만 아니라 나라에는 절의 높은 충신으로, 관리로서는 청백리로 살아간 그분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포천군 소흘읍 무봉리에 ‘충목단’이라는 단을 지어 그분을 기리고 있다. 일 년 중 가을에 포천의 유림들이 제향을 지내고 있다.

그분에게는 지금 본관이 두 개인데, 그것은 기계 유씨와 철령 유씨 집안에서 서로 자기네가 유응부 선생의 후손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죽은 지 250여 년 만에 복권이 되어 조정에서 유응부 선생의 제사를 올리려고 하는데, 그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서 애를 태우고 있었다. 이때에 철령 유씨들이 자기들이 유응부 선생의 후손이라 하여 임금으로부터 제사를 지내도 좋다는 교지를 받아 갔고, 이때부터 유응부 선생은 철령 유씨라는 본관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기계 유씨들도 유응부 선생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며 선생을 족보에 올리고 제사도 모셨다. 그래서 유응부 선생은 두 개의 본관을 갖게 되었고, 양쪽 집안의 족보에 모두 오르게 되었다.

유응부 선생이 역적으로 몰려서 처형을 당할 때 선생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선생의 동생 유응신이 강보에 싸서 북쪽으로 도망을 가서 자손들의 일부가 그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통일이 되어 북쪽 자손들의 본관이 확인되면, 철령 유씨와 기계 유씨 중에서 선생의 자손이 누구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모티프 분석]

「유응부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두 개의 본관’이다. 「유응부 이야기」유응부의 효성과 청백리로서의 관리, 절의 높은 충신 등의 면모를 소재로 하여, 기계 유씨와 철령 유씨 등 본관이 두 개가 된 내력을 소개하는 설화이다. 유응부가 절의 높은 충신임을 알게 해 주는 충목단은 어린 단종(端宗)[1441~1457]의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한 사육신의 충절을 널리 후세에 알리고자 1746년(영조 22)에 설치한 비각이다. 1987년 2월 12일 경기도 기념물 제1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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