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포천기곡봉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946
한자 抱川機谷烽火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병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86년 - 「포천기곡봉화」 저자 조경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657년연표보기 - 「포천기곡봉화」 창작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69년 - 「포천기곡봉화」 저자 조경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703년 - 「포천기곡봉화」를 수록한 『용주선생유고』 간행
성격 한시
작가 조경

[정의]

1657년 조경이 포천 기곡의 봉화가 타오르는 것을 보고 지은 칠언 율시의 한시.

[개설]

「포천기곡봉화(抱川機谷烽火)」는 1657년(효종 8) 71세 때 포천에 은거한 용주(龍洲) 조경(趙絅)[1586~1669]이 포천 기곡에서 봉화가 밤마다 타오르는 것을 보고 느낀 감회를 노래한 한시이다.

조경은 자(字)가 일장(日章)이고, 호(號)는 용주, 주봉(柱峯), 간옹(鬝翁) 등을 사용했다.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상헌(金尙憲)[1570~1652]과 같이 윤근수(尹根壽)[1537~1616]의 문인으로 남인 사선생(四先生)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1612년(광해군 4)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6년(인조 4) 정시에서 장원하여 정언을 역임하였다. 이후 사가 서당(賜暇書堂)에 선발되었고, 1645년(인조 23) 대사간, 대사성, 형조참판, 대사헌, 대제학이 되었고, 이후에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54년(효종 5) 포천에 은거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고, 1655년(효종 6)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포천기곡봉화」조경의 문집인 『용주선생유고(龍洲先生遺稿)』 권(卷) 2에 전하는 작품이다. 『용주선생유고』는 조경의 손자인 순천 부사 조구원(趙九畹)[1656~?]이 1703년에 간행했다. 분량은 23권 9책으로 권 1~5는 시이고, 권 6~22는 문, 권 23은 「동사록(東槎錄)」이다.

[내용]

위봉흘립란산중(危峯屹立亂山中)[우뚝 솟은 험준한 봉우리 가득한 산중에]

상유관봉야야홍(上有爟烽夜夜紅)[정상에서 타오르는 봉화가 밤마다 붉구나.]

어차족지왕법대(於此足知王法大)[이로써 왕법의 지엄함을 알 수 있도다]

기년장사사방동(幾年長使四方同)[몇 해를 전국에서 이같이 행하네.]

천변고영련호지(天邊孤影連胡地)[하늘 끝 외로운 그림자는 변방까지 이어져]

종후미광조한궁(鍾後微光照漢宮)[희미한 빛을 모아 한나라 황궁을 비추었네.]

하행여금봉성주(何幸如今逢聖主)[지금의 성군을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낭연소식임촌옹(狼煙消息任村翁)[전화(戰禍)가 끝나 촌로(村老)로 살아가네.]

[특징]

「포천기곡봉화」는 마지막 행의 ‘전화가 끝나 촌로로 살아가네[狼煙消息任村翁]’라는 구절을 참고하면 본래 거창 사람이지만 조경이 71세에 포천에 은거한 후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포천기곡봉화」는 병자호란을 몸소 겪은 조경의 감회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의의와 평가]

조경이 1643년(인조 21) 일본 통신사 부사로 다녀온 과정을 기록한 「동사록」은 『해행총재(海行摠載)』에 포함되어 있는데, 내용도 특이해 당시 조선 학자의 일본에 대한 이해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기도 하다. 현재 이덕형(李德馨)[1561~1613]과 함께 포천의 용연 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