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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66
한자 趙絅
이칭/별칭 일장(日章), 용주(龍洲), 주봉(柱峯), 간옹(鬝翁), 문간(文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612년 - 조경 사마시 합격
추모 시기/일시 1676년 - 조경 영의정 추증, 문간 시호 받음
출생 시기/일시 1586년 10월 6일연표보기 - 조경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69년 2월 5일연표보기 - 조경 사망
거주|이주지 조경 거주지 - 경기도 포천시
외가|처가 조경 외가 - 경상남도 거창군
부임|활동지 목천 현감 - 충청남도 천안시
부임|활동지 지례 현감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부임|활동지 문천 군수 - 함경남도 문천군
부임|활동지 전주 부윤 - 전라북도 전주시
회양 부사 - 강원도 회양군
묘소|단소 조경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산1-1
사당|배향지 용연 서원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165
사당|배향지 곡강 서원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송3리
사당|배향지 문암 서원 -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용산1리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한양(漢陽)
대표 관직 의정부 우참찬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학자이자 문신.

[개설]

조경(趙絅)[1586~1669]은 포천 지역 한양 조씨(漢陽趙氏) 집성촌을 구체화한 인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복구하지 못한 사당을 선영 아래에 건립하여 세거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또한 그 옆으로 관거재(寬居齋)란 가숙(家塾)을 지어 자제를 교육하는 장소로 삼았다.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 주봉(柱峯), 간옹(鬝翁)이다. 세종 조에 우의정을 역임한 조연의 8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추증된 조수곤(趙壽崐)이고, 할아버지는 공조좌랑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조현(趙玹)이며, 아버지는 사섬시 봉사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된 조익남(趙翼男)이다. 어머니는 유개(柳愷)의 딸인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다. 부인은 김찬(金瓚)의 딸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조선 전기 좌정승(左政丞)을 지낸 김사형(金士衡)의 9세손이다. 슬하에 3녀 1남을 두었다.

[활동 사항]

조경은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출해서 주위에서 기재(奇才)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의 발호로 광해군의 난정(亂政)이 도를 더하자 정계 진출을 단념하고 영남 거창에 은거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창 현감과 경상도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형조좌랑과 목천 현감 등을 지냈고, 1626년(인조 4)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 등을 거쳐 홍문관 교리와 사간원 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사헌부 지평 재직 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시종하였으며, 1626년(인조 4)부터 시행된 호패법의 폐단이 심해 백성의 원성이 높자 김육(金堉)과 함께 호패법을 혁파할 것을 강력히 상소하였다. 1629년(인조 7) 사간원 헌납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으며,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받았다. 사가독서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이다.

1630년(인조 8) 홍문관 수찬을 거쳐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1631년(인조 9) 홍문관 부교리 재직 시에는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추숭이 잘못되었음을 논하였다가 특명으로 지례 현감으로 전보되었다. 1633년(인조 11) 이조 정랑을 거쳐 1635년(인조 13)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는데, 생원진사시를 파방(罷榜)할 것을 요청하였다가 문천 군수로 옮겨졌다. 곧이어 정온(鄭蘊)의 구원으로 다시 관직에 진출, 군기시정이 되었다가 호남의 염문사(廉問使)로 파견되었다.

1636년(인조 14) 사간원 사간이 되어 직언을 하다가 두 번째 투옥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斥和)를 주장하였고, 일본에 청병하여 청나라 군대를 격퇴하자고 상소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39년(인조 17) 관직을 그만두고 거창으로 돌아갔다가 다음 해인 1640년(인조 18) 사간원 사간에 제수된 뒤 국정을 위한 방책 10가지를 제시한 ‘시무 십책(時務十策)’을 올렸다. 1643년(인조 21)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의 부사로 차출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644년(인조 22) 통정대부로 올라서는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겨울에 김제 군수에 제수되었다가 곧이어 전주 부윤이 되었으나 가솔을 거느리고 부임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그만두었다. 1645년(인조 23) 대사간, 대사성, 형조참판, 대사헌, 대제학을 지냈고,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47년(인조 25)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고, 이조판서 재임 시에는 이도(吏道)를 쇄신하여 관리 등용에 공정을 기해 명망을 얻었다. 1649년(인조 27) 우참찬과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650년(효종 1) 청나라에서 척화신(斥和臣)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자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와 회양 부사를 지내고 고향 포천으로 낙향하였다. 1655년(효종 6) 70세가 되던 해에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기로소는 조선 전기부터 노신(老臣)을 예우하기 위하여 만든 제도인데, 기로소에 들려면 정2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으로서 나이가 70세 이상이어야 하며 반드시 문과 출신이어야 하였다. 1658년(효종 9)에는 김육, 윤경(尹坰), 윤이지(尹履之), 오준(吳竣)과 함께 오노회(五老會)를 만들었다. 1659년(효종 10) 효종이 승하하자 입궐하여 곡하고 시책문을 지었다.

1660년(현종 1) 상소를 올려 기민 구제책을 건의하였고, 1661년(현종 2)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예송 논쟁이 일어나자 윤선도(尹善道)를 변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삼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잠시 관직 생활을 접고 백운산과 삼부연 폭포 등을 유람하였다. 1664년(현종 5) 다시 서용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학문과 저술]

조경은 흔히 김상헌(金尙憲), 조익(趙翼), 이정구(李廷龜) 등과 함께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학맥이 붕당을 결정짓는 조선조 붕당의 특성상 조경의 행적은 이례적이다. 윤근수는 선조 대 서인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따라서 그 문인도 예외 없이 서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경은 남인이었다. 붕당의 공식에 어긋나는 이런 행태는 조경이 윤근수 말고도 거창에 살던 문위(文緯)와의 관련 때문이었다.

일찍이 조경의 집안은 조경의 할머니로 인해 거창에 생활 기반을 가졌고, 그래서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문위를 찾아 뵌 적이 있다. 특히 광해군 때 10여 년간 거창에 머무르면서 정식으로 문위를 사사하여 사승(師承)[스승에게 학문이나 기술 따위를 배워서 이어받음] 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문위의 묘지명에도 나와 있다. 이에 비해 조경의 글에서 윤근수와의 사승 관계를 언급한 글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인조 이후의 정계 활동에서 그가 남인계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동문인 김상헌과 갈등 대립하며 이유태(李惟泰)·송준길(宋浚吉) 등 산림계(山林系)의 배척을 받았던 사실은 바로 문위와의 학연에서 유래한 면이 크다고 할 것이다.

저서로 『용주유고(龍洲遺稿)』가 있다. 이는 1674년(숙종 즉위년) 아들 조위봉(趙威鳳)이 가장 초고(家藏草稿)를 교정 편차하고, 손자인 조구완(趙九畹)이 1703년(숙종 29) 전라도 순천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한편 유고 외에 저서로 『용주일기(龍洲日記)』가 있는데 정묘호란 때의 기록을 담은 ‘정묘일기(丁卯日記)’, 1635년 암행어사로 전라도를 순찰한 ‘을해남정일기(乙亥南征日記)’, 1636년~1637년 병자호란 시의 내용을 담고 있는 ‘병정일기(丙丁日記)’, 1650년 효종 초년의 복잡한 대청 관계를 기술한 ‘경인일기(庚寅日記)’, 그리고 1651년(효종 2) 당시의 정치, 사회 각종 기사를 수록한 ‘신묘일기(辛卯日記)’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문집 편찬 시 함께 정리된 것이나 간행 때 제외되어 필사본으로 전해진다.

1643년 통신사의 부사로 차출되어 일본에 다녀온 뒤 기행문인 『동사록(東槎錄)』을 저술하였다. 『동사록』은 문장 자체로서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사정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일본 실정과 통신사 관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포천 읍지인 『견성지(堅城誌)』 편집을 시작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그 뒤 이세욱(李世郁)이 자료를 모아 읍지를 편찬할 때 조경의 손자인 조수의(趙守誼)가 편집을 담당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에 있다. 포천시 향토 유적 제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1676년(숙종 2)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시장(諡狀)은 허목(許穆)이 찬술하였다. 포천의 용연 서원(龍淵書院), 흥해(興海)의 곡강 서원(曲江書院), 춘천의 문암 서원(文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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