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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종상인축병소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924
한자 題宗上人軸幷小序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흥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53년 - 「제종상인축병소서」 저자 이호민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34년 - 「제종상인축병소서」 저자 이호민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636년 - 「제종상인축병소서」를 수록한 『오봉집』 간행
배경 지역 이호민 선생 묘 및 신도비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성격 한시
작가 이호민

[정의]

조선 후기 이호민이 선영을 포천의 꽃골로 옮겼지만 미처 옮기지 못한 부인의 무덤을 지켜 준 산객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칠언 율시의 한시.

[개설]

「제종상인축병소서(題宗上人軸幷小序)」는 조선 후기 이호민(李好閔)[1553~1634]이 조상의 선영(先塋)을 포천의 꽃골[花谷]로 옮겼지만 미처 옮기지 못하고 홀로 남은 부인의 무덤 옆에 암자를 짓고 시묘살이를 해 준 산객(山客)에게 감사를 표현하고자 바친 한시이다. 「제종상인축병소서」이호민의 문집 『오봉집(五峯集)』 권(卷) 4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제종상인축병소서」[문중 어른들의 자리에 대한 소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가문의 6대조이신 지보주공과 연천군·연원군의 묘는 함께 양근의 치소 동쪽 미지산[용문산] 서쪽 사천 마을에 있다. 경인년(1590년, 선조 23) 가을[8월] 나는 죽은 부인을 이곳에 묻었다. 진실로 현조(玄祖)의 묘를 수호하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 경치의 훌륭함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으며, 늘그막의 계획을 위해서였다.

경자년(1600년, 선조 33) 겨울 천마산의 우리 집안 선영을 나라의 비용으로써 포천의 꽃골로 옮겼다. 새로운 묫자리 초창기에는 두 곳을 간호하기 어려워 아울러 부인의 무덤도 장차 꽃골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세월이 다하지 않아 옮길 수 없었기에 잠시 산객(山客) 어른으로 하여금 풀로 마루를 올린 암자에서 시묘살이를 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시를 바침으로써 그에게 감사하고자 한다.”

[吾家六代祖知甫州公及延川延原君墓 俱在楊根治東彌智山西斜川之洞 庚寅秋 余就葬亡夫人於此 實爲守護玄祖墓 而亦愛其泉石之勝 爲晩年計也 庚子冬 吾天磨先塋 以國用遷于抱川之花谷 新卜草創 難於兩地看護 將幷遷亡夫人於花谷 而不可以歲月盡遷 姑令山人結草庵居之 仍贈詩以謝之]

용문수장자현고(龍門壽藏自玄高)[용문산에 생전 무덤을 쓴 것은 현고(玄高)부터이네]

아장망인작계뢰(我葬亡人作計牢)[부인을 안온한 곳에 장사 지내고자]

근욕이래향화곡(近欲移來向花谷)[내 근래에 꽃골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시류향화재암오(始留香火在巖嶅)[당초에 머무른 곳의 향불이 바위산을 밝혔네]

가암세착청라경(架庵細斲靑蘿逕)[시렁 엮은 암자에 얇게 깎은 푸른 담쟁이 지나고]

설납신개백석조(雪衲新開白石槽)[새로 펼쳐 놓은 흰색 석조(石槽) 눈에 젖네]

안득여사동승사(安得與師同勝事)[신령과 더불어 함께하지 않으면 어찌 훌륭한 일을 얻을 수 있겠나이까]

거피애밀양포도(去披厓蜜釀蒲萄)[낭떠러지 헤쳐 가며 꿀맛 같은 포도주 빚으세]

[의의와 평가]

이호민은 문장에 뛰어났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왕명으로 각종 글을 작성하였는데, 그가 지은 교서(敎書)는 내용이 간절하고 표현이 아름다워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교서 등의 글보다는 한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의주에 있을 때에 일본의 수중에 있던 서울을 삼도의 군사가 연합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 「용만행재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下三道兵進攻漢城)」은 절창으로 널리 애송됐다. 「제종상인축병소서」는 이런 평가를 받고 있는 이호민과 포천의 관계를 보여 주는 한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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