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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어제석왕사비문과포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889
한자 奉御製釋王寺碑文過抱川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흥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48년 - 「봉어제석왕사비문과포천」 저자 유득공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85년 - 유득공 포천 현감 부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88년 - 유득공 포천 현감 이임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791년연표보기 - 「봉어제석왕사비문과포천」 유득공 창작
저자 몰년 시기/일시 1807년 - 「봉어제석왕사비문과포천」 저자 유득공 사망
성격 한시
작가 유득공

[정의]

1791년 유득공이 「어제석왕사비문」을 받들고, 석왕사로 향하는 길에 포천을 지나며 읊은 오언 율시의 한시.

[개설]

「봉어제석왕사비문과포천(奉御製釋王寺碑文過抱川)」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1748~1807]이 정조(正祖)가 지은 「어제석왕사비문(御製釋王寺碑文)」을 받들고, 함경도 안변(安邊)의 석왕사(釋王寺)로 향하는 길에 지난날 포천 현감으로 재직[1785(정조 9)~1788년(정조 12)]했던 포천을 지나면서 감회를 적은 한시이다. 유득공은 박학한 학자이자 동시에 이덕무(李德懋)[1741~1793],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1754~1825]와 더불어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 중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유득공은 기행시(紀行詩)에 뛰어났는데, 고대사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옛 수도들을 회고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등을 남기기도 하였다.

「봉어제석왕사비문과포천」유득공의 문집인 『영재집(泠齋集)』 권(卷) 5에 실려 있다. 권 5에는 고금체시(古今軆詩)가 대체로 시대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창창마홀군(蒼蒼馬忽郡)[짙푸른 마홀군[삼국 시대 고구려가 포천을 점유할 당시의 지명)]

일로향동분(馹路向東分)[역로는 동쪽으로 향하며 갈라지네]

홍엽루초상(紅葉樓初上)[홍엽루[유득공이 포천 현감 재직 시에 세운 누각]에 처음으로 올라서

청성고재문(靑城鼓再聞)[청성[통일신라가 포천을 점유할 당시의 지명]의 북소리를 다시 듣네]

객포첨협설(客袍沾硤雪)[좁은 길을 지나다 쌓인 눈에 나그네의 도포 젖어들고]

정패암관운(征旆暗關雲)[펄럭이는 깃발 관문 구름을 가리네]

부로난가배(父老攔街拜)[부로들이 길을 막고 절하며]

의의구사군(依依舊使君)[헤어지기 서운하여 옛 현감을 아쉬워하네]

[특징]

정조는 특이하게도 불교 사찰인 안변 석왕사에 대한 비문을 지었는데, 이는 석왕사가 조선의 건국에 크게 기여했던 신승(神僧) 무학(無學)이 머물렀던 곳이고 인목왕후(仁穆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등이 지속적으로 후원을 했던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의 저자로서 고대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봉어제석왕사비문과포천」에도 포천을 옛 지명인 마홀(馬忽), 청성 등으로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의의와 평가]

「봉어제석왕사비문과포천」을 비롯하여 「남산관 차숙포천운」, 「도포천」, 「모숙포천」 등은 조선 시대 포천을 배경으로 한 한시들 가운데 포천을 지나면서 지은 시이다. 기타 유람기(遊覽記)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 시대 포천은 한양과 함경도를 잇는 ‘경흥로(京興路)’의 도로 상에 자리 잡아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던 무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지역이다.

조선 후기 문예 부흥기라고 일컬어지는 영조, 정조 재위 시기의 인물들 가운데는 포천, 영평 등과 관계가 있는 인물이 많다. 신경준(申景濬)[1712~1781], 성대중(成大中)[1732~1812], 성해응(成海應)[1760~1839], 백동수(白東脩)[1743~1816], 서이수(徐理修)[1749~1802], 이서구, 유득공, 박제가 등은 각각 포천이 고향이거나, 거주했거나, 사또로 부임했던 인물들이다. 「봉어제석왕사비문과포천」은 이들 가운데 유득공이 포천 현감으로서 가졌던 포천과의 관계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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