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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 요충지,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마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003
한자 南北-要衝地-三國-角逐場-馬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문창로

[정의]

삼국 시대 백제·고구려·신라의 각축장이자, 통일 신라 시대의 남북의 요충지로서의 포천.

[개설]

포천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중부 내륙에 위치하여 남과 북을 이어주는 관문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한강 유역의 선사 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삼국 시대에는 백제·고구려·신라의 각축장이 되면서 이들 삼국의 문화를 온전히 간직하기도 하였다. 특히 초기 백제의 영향권 아래에서 성장하였던 포천은 삼국의 각축 과정에서 고구려의 남진이나 신라의 북진 과정에 군사적 요충지로 부각되었다. 이는 지역 내에 산재한 산성의 존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신라의 통일 과정과 그 이후에도 포천 지역이 갖는 전략적 기능은 중요하게 유지되었다.

[백제의 포천 지역 지배와 그 전략적 위상]

백제는 2세기 중반 이후 마한 북부의 여러 소국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며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소국 연맹체를 이끌어 갔다. 경기 북부의 중앙에 위치한 포천 지역의 소국도 백제의 영향권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본다. 당시 포천은 중국 군현 지역에서 한성(漢城)으로 통하는 군사적 통로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된다. 특히 북방의 대방군과 인접하였기 때문에 3세기 중반 백제 고이왕 대에 중국 군현과 벌인 기리영(岐離營) 전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을 것으로 예상되며, 동쪽으로 철원·춘천 지역의 예족 및 북쪽의 대방군과 대치하면서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것이다.

4세기 들어 고구려는 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 대인 311년 서안평을 습격하여 중국 본토와 낙랑군의 통로를 단절시킨 뒤, 313~314년 남쪽의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병합하였다. 고구려는 남방의 중국 군현 세력을 서북한 지역에서 쫓아내고 대동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제 백제의 북쪽 경계는 중국 군현을 대신하여 고구려 세력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백제의 동북방에 자리한 포천은 고구려와 대치하는 접전 지역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재위 331~371]은 319~342년 요동 지방으로 진출한 선비족의 모용씨(慕容氏)와 충돌하여 침략을 받자, 대외 관계를 ‘북수 남진(北守南進)’의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369년(고국원왕 39)에 군사 2만을 이끌고 백제의 북쪽 경계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대방 고지(帶方故地)를 둘러싸고 백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치양(雉壤)[황해도 배천(白川)]), 패하(浿河)[예성강] 등지에서 백제에 참패를 하였고, 고국원왕은 백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위기를 맞았다.

반면 백제근초고왕 대인 369년 남쪽 방면의 마한(馬韓)을 멸망시켜 전라도 남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북쪽으로 대방 고지에 진출하면서 황해도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이처럼 4세기에 접어들어 서북한 지역의 한 군현이 소멸하면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완충 지대가 없어지게 되었고, 남하 정책을 추진하던 고구려와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 사이의 군사적 충돌이 지속되었다. 백제의 동북방에 자리한 포천은 철원 방면에서 광나루를 거쳐 백제의 수도 한성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어, 고구려 세력의 남하를 막아 내는 군사적 요충지로 부각되었다.

포천의 군사적 중요성은 포천 고모리 산성(抱川古毛里山城), 반월산성(半月山城) 등 지역 내에 산재한 옛 성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포천 고모리 산성은 백제 초기의 대성(大城)으로 기능하면서 성동리 산성(城東里山城)이나 고소성(姑蘇城) 등과 함께 고구려 군이 남양주(南楊州)[광릉~퇴계원~구리]를 거쳐 아차산성(阿且山城)과 풍납토성(風納土城)에 이르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에서 축성하였다.

포천 지역 산성의 종선은 철원 방면에서 남하하는 고구려 군과 북한산성에서 철원 방면으로 진출하는 신라군이 충돌하던 주요 교통로로 이해된다. 또한 반월산성은 백제 초기부터 도성[한성]을 방어하는 전방위 성으로서 고구려의 방어를 위한 일진을 형성하여 아단성(阿旦城) 방면으로 진출하려는 고구려 군을 일차적으로 저지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 남진과 마홀 지명의 대두]

고구려는 광개토왕(廣開土王)[재위 391~413]의 즉위를 기점으로 백제와의 전투에서 우위에 서면서 남쪽의 백제 지역을 적극 공격하는 형세로 전환되었다. 광개토왕은 396년(영락 6)에 수군(水軍)을 이끌고 백제를 친정(親征)하여 관미성(關彌城)과 아단성(阿旦城) 등 임진강과 한강 유역의 백제 58성(城) 700촌(村)을 공략하고, 한강을 건너 한성에 이르자 백제아신왕이 항복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차지한 58성 가운데 포천 지역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곧 미사성(彌沙城)은 대전리 산성의 백제 때 명칭으로 고구려의 매초군(買肖郡)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고모루성(古牟婁城)은 포천의 고모리 산성에 비정되기도 한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長壽王)[재위 412~491]은 427년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면서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감행하였다. 이는 백제와 신라에 큰 위협이 되었으며, 이에 두 나라는 433년 나제 동맹(羅濟同盟)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에 공동 대처하였다. 특히 백제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은 고구려의 남침에 대처하기 위하여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군사 요청을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고구려 군의 공격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피살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에 백제는 웅진(熊津)으로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고구려는 한성을 포함한 한강 유역 일대를 차지하였다. 그 뒤 고구려의 내분을 틈타 백제성왕(聖王)과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동맹군이 공동 작전으로 각각 한강 하류와 중·상류를 공격하여 빼앗는 6세기 중반인 551년까지 고구려는 남쪽으로 한강 유역 일대를 비롯하여 죽령(竹嶺)·조령(鳥嶺) 일대에서 남양만(南陽灣)을 연결하는 선의 영역을 지배하였다.

그런 탓인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5 지리지2 신라조와 권37 지리지4 고구려조에는 신라 통일 후의 지방 통치 제도인 9주 가운데 한주(漢州)[한산주(漢山州)], 삭주(朔州)[우수주(牛首州)], 명주(溟州)[하슬라주(何瑟羅州)]를 고구려의 옛 땅으로 기록하였고, 이때 포천 지역은 한주(漢州)에 편제되었다.

이처럼 4세기 말 본격화된 고구려의 남진으로 포천은 백제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며, 6세기 중반 백제와 신라가 공동 작전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을 때까지 고구려에 예속되었다. 포천의 ‘마홀(馬忽)’이라는 지명은 이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대두하였다. 곧 마홀이란 지명은 1995년 반월산성에서 출토된 명문 기와에서도 확인되며, 『삼국사기』 권35 신라지에 “본래 고구려의 마홀군’이었는데, 경덕왕 16년[757]에 한식(漢式)으로 이름을 고쳐 ‘견성군(堅城郡)’이라 하였다”라고 전한다.

[신라의 북진과 포천 지역의 위상]

신라는 6세기 중반 진흥왕[재위 540~576] 때에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포천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당시 한강 유역을 둘러싼 고구려·백제·신라 사이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는 한반도 중심부에 위치한 한강 유역의 정치·군사적인 의미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진흥왕 대 신라의 북진 활동은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를 비롯하여 함경도 일대의 황초령비·마운령비[568] 등의 순수비(巡狩碑)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신라는 삼국 통일을 이루는 7세기 중반까지 100여 년 동안 실지 회복을 꾀하는 고구려와 백제의 양면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아 한때 국가적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6세기 중반~7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포천 인근 양주(楊洲) 분지의 보루(堡壘)들은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신라 보루가 섞여 있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 같은 현상은 당시 포천을 포함한 경기 북부 지역에서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전선이 유동적이었음을 알려 준다.

특히 7세기에 들어 신라와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신라 통일 이전까지 전개된 양국의 전투는 대체로 칠중성(七重城)과 낭비성(娘臂城), 북한산성(北漢山城) 등지로 확인되어 이 시기에 신라가 임진강과 한탄강 일대에서 고구려 군과 대치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신라는 602년(진평왕 25) 북한산성을 공격하는 고구려 군을 격퇴하였으며, 이듬해 남천주를 폐지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북한산주는 현재 양주시 주내읍으로 비정되는데, 당시 포천 지역은 북한산주의 동북쪽에 자리하여 철원이나 연천 방면에서 남하하는 고구려 군을 방어하는 주요 거점으로 추정된다. 곧 고구려의 남하를 임진강과 한탄강 선에서 저지하려는 신라는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고구려에 대한 방어전을 수행하면서 동북쪽 최전방의 방어 거점으로 포천 지역의 반월산성을 활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처럼 신라는 7세기 초반부터 한산주를 두어 포천 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를 도모하였다. 당시 주(州)가 군사 거점의 성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한산주에 편제되었던 포천은 철원이나 연천 방면에서 남하하는 고구려 세력을 최북단에서 방어하는 군사적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삼국의 각축전은 7세기 중반에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신라는 옛 고구려·백제의 영토를 두고 당나라와 전면전을 벌였다. 특히 신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남하하는 당나라 군대를 매초성 전투에서 크게 이겨 북쪽 육로를 통한 당군(唐軍)의 남침을 봉쇄하면서 대당 전쟁의 결정적 승기를 잡았다. 매초성 전투가 양주의 치소로 추정되는 대전리 산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상정할 때, 인접한 포천은 반월산성을 중심으로 당군의 침입로인 황해도 재령~적성~연천·포천, 회양~철원~연천·포천 등의 통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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