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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184
한자 徐廷禧
이칭/별칭 농천(農泉), 묵재(默齋)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계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6년연표보기 - 서정희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94년 - 서정희 관립 영어 학교 입학
추모 시기/일시 1970년 - 서정희 국민 훈장 무궁화장 추서
출생지 서정희 출생지 -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서정희 이주지 - 경기도 포천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재북 평화 통일 촉진 협의회 중앙 위원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호는 농천(農泉), 묵재(默齋). 조선 중기의 문신 서성(徐渻)의 12세손이며, 아버지는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서병갑(徐丙甲)이다.

[활동 사항]

서정희(徐廷禧)[1876~?]는 187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894년에 관립 영어 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7월 권중현(權重顯)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남도 진도군에 3년간 유배되었고 1910년 귀양이 끝난 뒤 전라남도 광주시에 머물면서 사회 운동을 펼치는 한편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19년 3월 광주에서 3·1 운동을 주도하였고 이 일로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광주 지방 법원에서 2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1년이 감형되어 석방되었다.

1920년 10월 출옥 후 농민 운동에 관여하여 소작 쟁의 운동을 활발하게 펼쳤고 전라도 노농 총연맹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사회주의 단체인 북풍회(北風會) 운동에 관여하여 제2차 조선 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1925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7년 11월 조선 공산당 사건 관계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1928년 2월 무죄를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이때 오랜 감옥 생활과 연로한 나이로 인해 위장병이 심해지자 면회 온 친구에게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출옥 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해 활동하였는데, 얼마 뒤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되자 이에 적극 반대하였다. 오류는 사회주의자가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한 것에 있으며, 한번 참여한 이상 신간회 내부 조직을 더 충실히 하고 각 부문으로 나아가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1년 12월 서울로 돌아온 뒤에 민중의 구제 사업에 많은 관심을 갖는 한편 조선인의 만주 이민을 적극 장려하였다. 그 뒤 1940년 포천으로 이주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1945년 9월 한국 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중앙 감찰 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한국 민주당에서 주최한 신탁 통치 반대 전국 대회 집행 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3월 한국 민주당 중앙 감찰 위원장, 1947년 4월 반탁 독립 투쟁 위원회 지도 위원, 같은 해 6월 대한 독립 촉성 국민 대회 본부 중앙 상무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한국 민주당의 핵심 간부로 떠올랐다. 1948년 5·10 선거에서 한국 민주당 공천을 받아 경기도 포천군에서 출마, 제헌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해 6월 제헌국회에서 국회법 제정 기초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반민족 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기초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7월 6·25 전쟁 중 납북되었고, 1957년 재북 평화 통일 촉진 협의회 중앙 위원이 되었다.

[저술 및 작품]

『신민』 8호[1925년 12월]에 「소작인의 최소한도의 요구」, 『별건곤』 6-2호[1931년 2월]에 「해소론은 일종 오류」가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1970년 국민 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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