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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천 시 상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648
한자 莅抱川時上疏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흥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573년 - 「이 포천 시 상소」 이지함이 작성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6-1
성격 고문서
관련 인물 이지함
용도 상소문

[정의]

1573년 이지함(李之函)이 포천 현감 시절에 올린 상소문.

[개설]

「이 포천 시 상소(莅抱川時上疏)」[포천 현감 시절에 올린 상소문]는 고을이 빈약하여 곡식이 모자라자 해읍(海邑)의 어량(漁梁)[어장]을 몇 번으로 나누어 받아 곡식을 사서 빈약한 재정을 보충하게 해 달라고 토정(土亭) 이지함[1517~1578]이 선조에게 올리는 글이다. 그러나 상소가 받아들이지 않자 이지함은 본디 고을 원으로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1574년 병을 핑계하여 사직하고 돌아갔다. 이지함은 1573년 탁행지사(卓行之士)로 천거되어 6품 벼슬에 올라 포천 현감에 임명되었으며, 재직 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한 일화가 있다. 또한 현감으로 있으면서 스스로의 처신을 검소하게 하고 백성 보기를 자식처럼 하였던 관리였다.

[구성/내용]

「이 포천 시 상소」『토정 유고(土亭遺稿)』 권상에 수록되어 있다. 「이 포천 시 상소」에는 이지함이 지향한 사회 경제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이지함은 당시 포천현 백성들이 매우 곤궁한 처지에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현실의 문제점을 없앨 수 있는 방책으로 크게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하였다.

이지함은 먼저 제왕(帝王)의 창고는 세 가지가 있음을 전제하고, 상책은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인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중책은 인재를 뽑는 창고인 이조와 병조의 관리를 적절히 통제하는 것으로, 하책은 백 가지 사물을 간직한 창고인 육지와 해양 개발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 중에서 이지함이 중점을 둔 것은 하책이었다. 이지함이 하책을 강조한 것은 결국 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연결되며,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상업과 수공업, 수산업 중시 사상과도 연결된다.

[의의와 평가]

「이 포천 시 상소」에서는 백성들의 이익을 무엇보다 우선한 이지함의 사회 경제 사상을 볼 수 있다. 당시 주자 성리학의 철학적 측면이 강조되던 사회 분위기에서 보면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농업이 중시되고 상업이나 수공업이 천시된 당시 사회에서 백성들의 생활 향상을 위한 방안으로 이지함만큼 적극적으로 농업이 아닌 산업의 가치를 인정한 학자는 흔치 않았다.

이지함은 국부(國富)의 증대 방안으로 어업이나 상업, 수공업, 광업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육지건 해양이건 국토에서 산출된 자원을 적극 개발하고자 하였다. 포천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포천 백성들의 실상을 직접 경험한 바탕 위에서 형성된 이지함의 사상은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로 지칭되는 후대 학자들의 이념과 합치되는 부분이 많다. 18세기 박제가(朴齊家)[1750~1805]와 같은 북학파 학자는 200여 년 전에 이미 상업의 중요성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한 이지함의 사상에 깊이 감탄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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