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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114
한자 李之菡
이칭/별칭 형백, 형중, 토정, 수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조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7년연표보기 - 이지함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3년연표보기 - 이지함 포천 현감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78년연표보기 - 이지함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13년 - 이지함 이조 판서에 추증
거주|이주지 이지함 거주지 - 경기도 포천시
묘소|단소 이지함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27-3
사당|배향지 인산 서원 - 충청남도 아산시
사당|배향지 화암 서원 - 충청북도 보은군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한산
대표 관직|경력 포천 현감

[정의]

조선 전기 포천 현감을 지낸 문신이자 기인(奇人).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형중(馨仲), 호는 수산(水山)·토정(土亭).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를 추증 받은 이장윤(李長潤)이며, 아버지는 우봉 현령 이치(李穉)이다. 우의정 김극성(金克成)이 외할아버지이다.

[활동 사항]

이지함(李之菡)[1517~1578]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의 밑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서경덕(徐敬德) 문하에 들어가 큰 영향을 받았다. 후일 그가 수리(數理)·의학·복서(卜筮)·천문·지리·음양·술서(術書) 등에 달통하게 된 것도 서경덕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지함은 당대 대학자인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등과 학문적 교류를 가졌으며, 조헌(趙憲)에게서는 스승으로서 예우를 받았다.

이지함은 생각과 행동이 초탈하며 파격적이어서 기이한 일화를 많이 남겼는데, 서울 마포 강변에 흙으로 집을 짓고 밤에는 거기서 쉬고 낮에는 평평하게 만든 토실(土室) 위를 정자로 삼아 지내면서 ‘토정’이란 호를 사용한 것도 그중 하나이다. 1573년(선조 6) 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포천 현감이 되었고, 재직 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 많은 생명을 구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지함이 포천 현감으로 재직 시, 지역의 땅이 척박하여 백성은 풍년이 들더라도 추수 후 구휼을 갚고 나면 먹을 양식이 거의 없었다. 이에 이지함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주인이 없는 무인도를 얻어 굶주린 백성을 모아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워 식량을 마련하고자 계획하고, 전라도와 황해도의 땅을 빌리고자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포천 현감을 사직하였다. 1578년(선조 11) 아산 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자, 부임 즉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기인(飢人)[굶주린 사람]을 구호하였다.

[학문과 저술]

생애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으로 지은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냈다. 이지함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고 1년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가 심해짐에 따라 책을 지었는데, 그것이 『토정비결(土亭祕訣)』이라고 알려져 있다.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과 길지를 점지하였으며, 『농아집(聾啞集)』을 저술하여 어진 자에게 전하여 난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 조식(曺植)이 마포로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묘소]

묘는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27-3번지에 있는데, 1992년 8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320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아산시의 인산 서원(仁山書院)과 충청북도 보은군의 화암 서원(華巖書院)에 배향되었다. 1713년(숙종 39)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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