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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024
한자 先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선사/선사
집필자 조관휴

[정의]

포천 지역의 선사 시대 개괄.

[개설]

포천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반도라는 지리적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인류가 생활하던 선사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문화 흐름을 이해하는 데 포천 지역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포천의 서북 지역은 한탄강을 따라 한강 본류의 하류 지역과 연결되어 있고, 동북쪽으로는 추가령 지구대를 따라 주민의 이동로가 펼쳐져 있다.

포천의 수계(水系)는 시의 중앙으로 포천천이 지나며 수동천영평천과 합류하면서 한탄강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한탄강과 포천시의 양안에는 넓은 하안 평야가 발달하고 광주산맥의 지맥이 지나고 있어 포천시 전체로 보았을 때는 대체로 산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포천은 지리적으로 수량이 풍부하고 평야 및 구릉지와 산악지가 교차하고 있어 선사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기에 충분한 조건과 다양한 생태계를 제공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선사 시대의 포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리적인 연속성의 관점에서 인근 지역의 선사 문화까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의 행정적인 모습과 그에 따른 경계 및 구분은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크게는 지금까지 밝혀진 한반도 전체의 선사 문화를 이해하고 지리적으로 이웃한 연천과 철원, 그리고 남쪽의 의정부와 양주 지역에 대한 선사 시대의 문화 양상의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아직도 많이 드러나지 않은 포천의 선사 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의 생활이 자연 지리적 조건에 의해 큰 영향을 받던 선사 시대에는 사람들이 강과 해안 지역을 따라 지속적으로 이동·교류하면서 거주가 이루어졌는데 포천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인근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비롯하여 신석기 시대의 토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유구(遺構)가 발견되었던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抱川永松里先史遺蹟) 등은 포천의 자연 환경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문화가 발전하기에 유리한 여건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는 생물 분류학에서 유인원과 구별해 사람[hominin 혹은 hominid]으로 분류되는 고인류가 처음 등장한 때부터 1만 2000년 전 무렵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 Epoch, 洪積世]가 끝날 때까지 긴 시간대에 걸친 인류 문화의 원초 단계를 가리킨다. 이는 돌을 때려 만든 뗀석기[타제 석기]를 사용하던 시대라는 기술 발전 단계상의 한 개념으로 등장하였으며, 20세기 중반까지 흔히 빙하 시대와 동일 시기라고 잘못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 유적은 대부분 플라이스토세 후기[약 13만~1만 2000년 전]에 속하는데, 플라이스토세 후기는 간빙기 조건에서 시작하였으나 8만 년 전 무렵 극단적이며 복잡한 기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2만 2000년 전 무렵에는 최악의 기후 상태가 나타나 빙하가 크게 발달하며 전 세계 해수면이 현재보다 평균적으로 120~135m가량 낮아졌다. 이 최후 빙하 극성기[Last Glacial Maximum]를 비롯한 빙하기 동안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은 혹심한 환경 아래 놓여 있었는데, 북부 고산 지대에는 산간 빙하가 발달하였으며 황해는 거대한 분지로 노출되었고 동해는 내륙호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현재의 한반도 지형은 구석기 시대가 끝날 무렵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높아짐에 따라 그 윤곽이 갖추어졌다고 보인다.

구석기 시대에 인류는 현대의 수렵 채집 집단 대부분에서 볼 수 있듯 생계 자원으로 동물성 단백질보다 식물 자원을 더 많이 이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석기와 같은 많은 도구들이 식물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구석기 시대의 초기 고인류는 동물성 단백질을 사냥으로 얻기보다는 보통 다른 짐승이 먹고 버린 사체에 붙은 고기를 뜯어 먹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호모 속의 등장 이후 사냥은 점차 중요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단양 구낭굴 구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사슴 뼈를 한반도에서의 후기 구석기 시대 사냥의 증거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1930년대에 두만강 가의 함경북도 종성군 동관진에서 구석기로 보이는 유물이 발견되었으나, 본격적인 연구는 북한 지역에서는 1962년 함경남도 웅기 굴포리 서포항 패총의 신석기 시대 아래에서 유물이 발견되며 시작하였고, 남한 지역에서는 1964년 공주 석장리의 금강 가의 단애(斷崖)에서 유물이 발견되며 시작되었다.

남한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은 1970년대 말까지도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78년 연천 전곡리에서 주먹 도끼가 발견되면서 연구 활성화의 중요한 계기가 만들어졌으며, 1980년대에 들어 충주 댐 수몰 지구에서 후기 구석기를 대표하는 단양 수양개 유적(丹陽垂楊介遺蹟)이 조사되고 주암 댐 수몰 지구에서도 여러 후기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는 등 활발한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구석기 유적은 1,000곳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포천에서 구석기 시대 유적의 분포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영평천을 따라 분포하고 있는 제4기 지질 시대의 강안 단구 퇴적물이다. 강안의 단구 퇴적물은 강변에서 가까운 지역뿐만 아니라 현재의 유로(流路)에서 상당히 떨어진 지점에도 분포하고 있어 포천 일대에 제4기 지질 시대의 강의 변천 과정을 볼 수 있고, 인류의 생활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후기 구석기 유적이나 중석기 시대 유적의 경우는 강안 단구 퇴적물이 아니더라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지만, 제4기 지질 시대의 영평천포천천의 퇴적물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점들이다.

이미 영평천 유역의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 등지에서는 구석기들이 채집된 바 있고, 일동면 화대리에서 후기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바 있다. 또한 영평천이 합류되는 한탄강 유역에서 구석기 유물이 대량으로 채집되는 것으로 볼 때 앞으로 구석기 유적이 다수 발견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상류에 속하는 철원 등지에서 한탄강 유역을 따라 구석기가 발견되고 있음은 구석기 시대의 인류가 이 지역 일원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앞서 말하였듯이 현재까지 포천의 구석기 유적은 주로 한탄강, 영평천, 포천천 유역에서 발견되었다. 곧 한탄강 유역의 포천시 관인면 중리 문배뜰 유적·중리 늘거리 유적·중리 아랫심재 유적을 비롯하여 사정리 화적연 유적, 자일리 팔호 유적·자일리 신촌 유적, 운천리 오호 유적, 포천천 유역의 신북면 금주리, 영평천 유역의 영중면 양문리·성동리·신장리창수면 오가리 등지에서 여러 면 석기[多角面圓球]·긁개·찍개·밀개 등의 유물이 여기저기에 보여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이 지역 일대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중리 늘거리 유적에서 발견된 흑요석 석기는 동북 지역에서 중부 지역으로의 인류 흐름의 방향과 활동 범위 등을 보여 주는 증거로 주목받았다.

대체로 구석기 유적이 확인된 지역에는 갱신세의 퇴적층이 폭넓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농지 정리와 경작 등으로 유적 파괴 및 훼손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포천과 가까운 유적으로는 영평천한탄강과 합류하는 지점인 연천군 전곡읍 신답리, 즉 아우라지라고 불리는 지점에서 많은 석기들이 채집된 바 있다. 아슐리안 주먹 도끼로 유명한 전곡리 유적은 포천에서 하류 쪽으로 약 4~5㎞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2. 신석기 시대

후빙기가 도래한 다음에도 몇 차례 상대적으로 춥고 더운 기후 조건이 반복되기도 하였지만, 자연 환경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바와 거의 같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 조건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서는 구석기 시대와 질적으로 다른 내용의 신석기 시대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석기 시대는 뗀석기를 쓰던 구석기 시대에 이어 간석기[마제 석기]를 만들고 사용한 시대라는 뜻으로, 구석기 시대라는 용어와 함께 19세기 후반에 제창되었다. 이어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착 생활과 토기 제작이 신석기 시대를 정의하는 문화 요소로서 추가되었다.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의 시작을 토기 등장과 더불어 정의할 때,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는 기원전 6300년 무렵 일본에서 분출한 화산재 아래에 놓여 있는 최하층에서 동북아시아 신석기 시대 초창기의 특징을 보여 주는 토기와 석기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은 아직 제주도에서만 발견되었으며, 자료 결핍으로 구석기에서 신석기 시대로의 전이 과정에 대한 설명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 무렵 청동기 시대가 시작하며 끝이 난다.

중부 지방의 신석기 문화는 암사동과 미사리 등 서울 부근의 한강 유역 유적에서 나타나는 문화들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바닥이 둥글거나 뾰족하고 몸통에 단사선문(短斜線文)[빗금무늬]이나 어골문(魚骨文)[생선뼈무늬]을 넣은 빗살무늬 토기가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문화이며, 이러한 문화의 퇴화한 형식이 경기 지방 서해안의 조개더미[貝塚]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이 한강 유역 신석기 문화의 주민들은 대체로 강이나 바다 가까이에서 물고기 잡이에 기반을 두고 생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이 지역 주민들의 전반적인 경제생활에 대한 복원은 불가능한 실정이다.

아마 이 시기에도 이미 주민들이 계절적인 이동을 하면서 살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는 암사동 주거지의 입지 조건이나 또는 서해 도서, 즉 영종도에서 나타난 노지군(爐址群)들의 성격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식량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기인 겨울철에는 주민들은 비교적 안정된 자원이 부존되어 있는 강가나 바다에서 많은 생활이 이루어졌을 것이며 이동 또한 강을 따라 많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한강과 연결된 임진강 및 한탄강 유역은 주민들의 중요한 이동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현재 나타나고 있는 빗살무늬 토기 조각들은 이러한 신석기 생활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포천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진 곳은 현재까지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중리 늘거리 유적에서 보고가 되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포천 지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은 매우 적게 확인되고 있지만, 구석기 시대나 청동기 시대 유적의 분포 상황으로 볼 때 장차 늘어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중리 늘거리 유적 발굴 과정에서 확인된 빗살무늬 토기 조각은 서해안 조개더미 유적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하여, 바닥이 둥글거나 뾰족하고 몸통에 단사선문이나 어골문을 굵고 성글게 새긴 특징을 가지고 있다.

3. 청동기 시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국 동북 지방의 상당한 부분을 포함한 넓은 지역은 기원전 2000년 후반기 무렵 유물과 묘제(墓制)를 비롯한 주요 문화 요소의 구성에서 주변 지역과 다른 독특한 특징을 보여 주는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한국 청동기 문화권으로 보이며, 여기에서는 지역적 특징을 보여 주는 청동기 문화가 각지에서 전개되었고, 고조선을 비롯한 한국 고대사상의 여러 정치체가 명멸하기도 하였다.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는 농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민무늬 토기와 간석기가 널리 사용되며 사회 복합도가 증가한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청동 유물은 한반도에서는 드물게 발견되며, 더욱이 남한 지역에서의 청동기는 보급이 늦은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개시 시점은 청동기 시대의 존재가 인정된 1960년대 이래 계속 변화되어 왔는데, 1970년대 말까지는 오르도스 청동기[Ordos 靑銅器]에서 기원하였다고 보아 그 시작을 기원전 7세기 무렵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는 의주 신암리와 내몽고 영성 남산근 출토 청동 유물을 비교해 기원전 10세기로 보게 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민무늬 토기 출토 주거지의 방사성 탄소 연대를 근거로 기원전 13세기로 올려 잡게 되었다. 다시 최근에는 민무늬 토기가 기원전 15세기에 발생하였고 청동기 시대도 기원전 15세기부터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제기되어 현재 논의가 진행 중이다.

청동기 시대는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 전통이 사라지고 토기의 형식이 다양화하면서 여러 종류의 토기 즉 홍도(紅陶), 각형 토기(角形土器)[팽이 모양 토기], 공렬 토기(孔列土器)[구멍무늬 토기] 등의 토기가 출현하고 묘제로는 고인돌과 함께 석상분(石箱墳)[돌널무덤]이 사용되던 시기이다. 이때는 신석기에서 시작된 농경이 더욱 발전하는 시기이며, 이에 따라 농경지를 낀 지역에 대규모의 취락이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포천의 청동기 시대 유적은 고인돌 유적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으며, 그 밖에 간돌 도끼·청동 검·반달 칼·민무늬 토기 등 청동기 시대의 주요 유물이 여러 곳에서 보고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포천 지역의 고인돌은 이른바 북방식 고인돌이다. 북방식 고인돌은 매장 시설이 지상에 드러나 있는 것이 특징이며, 포천의 고인돌은 대부분 지상에 4매의 판석으로 널방[墓室]을 만든 다음에 대형의 화강암 판석을 뚜껑으로 얹어 놓은 전형적인 북방식이다.

가산면 금현리, 포천시 자작동, 창수면 추동리, 일동면 수입리·기산리·사직리, 가산면 방축리 등지에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여러 문헌에서 다루고 있다. 이 외에도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나온 것으로 보고된 곳은 여러 군데 있다. 포천시 자작동 251-6, 이동면 노곡 3리, 신북면 만세교리 산4, 포천 종합 고등학교 부근, 관인면 중 1리 중리 마산 유적 등지에서 유물이 보고되었다. 포천 반월성지에서도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

4. 초기 철기 시대 이후

한국 고고학에서 초기 철기 시대라 부르는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기원전 100년경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연(燕)나라의 영향으로 주조 철기(鑄造鐵器)가 보급되면서 철기 문화가 시작되지만 아직은 철 소재와 철기의 대량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초기 철기 시대 이후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기원후 3세기 중엽까지의 시기는 원삼국 시대에 해당된다. 하지만 초기 철기 시대와 원삼국 시대를 통합하여 철기 시대라고 하거나 그 전반을 철기 시대 전기, 후반을 철기 시대 후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초기 철기 시대에는 철기가 보급되기는 시대지만, 한반도 안에서는 오히려 청동기의 제작 기술이 최고도에 도달하였으며 청동기 시대에 사용되던 간석기도 이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시대는 역사적으로 볼 때 후기 고조선과 위만 조선에 걸쳐 있다. 후기 고조선과 위만 조선은 중국 전국 시대의 연나라, 이후의 진·한 제국과의 외교 및 교역, 한편으로는 전쟁을 치르면서 내적 발전을 이루어 국가체로 성장해 간다. 이 시기에 중국 동북 지역의 송화강 유역에서는 부여가 성장하고 있었으며, 압록강 유역에서는 고구려 사회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한강 유역의 춘천 중도 유적이나 가평 마장리 유적이 기원전 1세기 이후의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현재까지 포천을 비롯한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의 철기 문화의 출현은 서북한 지역에 비해 늦은 것으로 보고 있다. 포천에서는 관인면 중리 용수재울 유적·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자작동 유적 등에서 다수의 집 자리 유구(遺構)와 함께 중도식 토기(中島式土器) 및 갈돌·갈판 등이 발견되었다.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은 다수의 주거지와 함께 경질 민무늬 토기 등 초기 철기 문화 유물이 채집되어 포천 지역 선사 문화의 단면을 전한다.

주거지는 남향의 凸자형으로 천변(川邊)에 자리하여 입지와 형식으로 보아 한강 유역의 원삼국 시대 주거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공반되는 긴 항아리형 무늬 없는 토기 역시 한강 유역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포천의 초기 철기 문화는 한강 유역과 동일한 문화권역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포천에서 확인된 초기 철기 시대 유적으로는 중리 아용수재울 유적,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 자작동 유적 등이 있으며 이 시기를 대표하는 도구로는 세형동검(細形銅劍), 동과(銅戈),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 이형 청동기(異形靑銅器) 등의 청동기로 단독으로 또는 철제 도구들과 함께 나타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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