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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020
한자 抱川市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포천시
집필자 장필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연표보기 - 포천군에서 포천시로 승격

[정의]

경기도 북부에 위치한 도농 복합 도시.

[개설]

포천은 본래 고구려의 마홀군(馬忽郡)으로서 757년(경덕왕 16)에 견성군(堅城郡)으로, 고려 초기에 포주(抱州)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423년(태종 13)에 지방 군현제 정비와 함께 포천으로 고쳐지면서 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포천군이 되었으며, 2003년에 도농 복합 시로 승격하였다. 행정 구역은 14개 읍·면·동[1읍, 11면, 2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구는 2012년 1월 1일 현재 6만 6527가구, 15만 7967명이다. 면적은 826.44㎢[서울의 1.4배, 경기도의 8.1%]이다.

[명칭 유래]

포천(抱川)이란 내를 품는다는 뜻으로 물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없고 흘러 나가기만 한다고 하여 안을 포(抱), 내 천(川)으로 이름 하였다 한다. 경기 북부의 중앙에 자리한 포천은 동북 방향으로 흐르는 포천천을 따라 남북으로 좁고 긴 충적평야를 끼고 형성된 지역이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포천은 동북과 서북, 동남과 서남을 각각 연결하는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수량이 풍부하고 평야 및 구릉지와 산악지가 교차하면서 다양한 생태계를 제공하는 등 자연 지리적으로 사람들이 살기에 적당한 조건을 갖추었다. 이와 같은 여건은 선사 시대 이래 이 지역에서 역사 문화가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좋은 배경이 되었으며 역사의 전개에 따라 경기 북부 지역의 행정 및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선사 시대]

인간 생활이 자연 지리적 조건에 의해 큰 영향을 받던 선사 시대에는 사람들이 강과 해안 지역을 따라 지속적으로 이동·교류하면서 거주하였다. 포천 지역 일대의 구석기 시대 유물은 주로 한탄강·영평천·포천천 유역을 따라 이루어졌다. 한탄강 유역의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중리 문배뜰·늘거리·아랫심재를 비롯하여 사정리 화적연, 영북면 자일리 팔호·신천, 운천리 오호, 포천천 유역의 신북면 금주리, 그리고 영평천 유역의 영중면 양문리·성동리·신장리창수면 오가리 등지에서 여러 면 석기·긁개·찍개·밀개 등의 유물이 나타나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이 지역 일대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밝혀주고 있다.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영송리관인면 중리 유적 발굴 과정에서 확인된 빗살무늬토기 조각은 서해안 조개더미 유적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임진강의 학곡리 부근에서도 다량의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채집되어 서해안 빗살무늬 토기인들이 임진강과 한탄강을 거쳐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게 해주고 있다.

경기도 포천지역의 신석기 문화는 넓게 보아 한강 유역의 문화권 범주에 포함되며, 자연 지리적으로 볼 때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 시대가 끝나고 민무늬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청동기 시대는 대략 기원전 1000년경부터 기원전 3세기경까지를 하한으로 삼는데, 대표적 유물로는 민무늬 토기를 비롯하여 고인돌, 청동 거울, 간돌검 등을 꼽는다. 현재까지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 널리 확인되고 있는 것은 고인돌이 대표적이며, 그밖에 간돌도끼, 청동검, 반달칼, 민무늬 토기 등이 여러 곳에서 보고되었다. 고인돌은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자작동, 창수면 추동리, 일동면 수입리·기산리·사직리, 신북면 만세교리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경기도 포천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의 철기 문화의 출현은 서북한 지역에 비하여 늦은 것으로 본다.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는 관인면 중리 용수재울·영중면 영송리·자작동 유적 등에서 다수의 집자리 유구와 함께 중도식 토기 및 갈돌·갈판 등이 발견되었다. 영송리 유적은 다수의 주거지와 함께 경질 무늬 없는 토기 등 초기 철기 문화 유물이 채집되어 포천 지역 선사 문화의 단면을 전하는데, 주거지는 남향의 凸자형으로 천변에 자리하여 입지와 형식으로 보아 한강 유역의 원삼국 시대 주거지와 큰 차이가 없다. 한편 영송리 유적은 이 지역에 대규모 취락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게 하는데 그 입지 조건 등으로 보아 초기 국가의 중요한 구성단위인 읍락의 성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고대]

2세기 중반 이후로 백제국이 마한 북부의 여러 소국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며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소국 연맹체를 이끌어 갔는데, 늦어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포천 지역의 소국도 백제국의 영향권에 편입되었다고 본다. 당시 포천은 중국 군현 지역에서 한성으로 통하는 군사적 통로에 위치했기 때문에, 백제 초기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되었다. 또한 포천은 백제 고이왕[234~286년] 때 중국 군현과의 기리영(岐離營) 전투에 참여하면서 백제와 특히 밀접한 관련을 맺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4세기에 고구려의 미천왕[300~331]이 서안평을 습격하여 중국 본토와 낙랑군의 통로를 단절시킨 뒤[311년], 남쪽의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병합하였다[313~314년]. 곧 고구려는 남방의 군현 세력을 서북한 지역에서 몰아내고 대동강 유역까지 그 세력을 넓혀갔다. 이에 백제의 변경에 위치한 연천, 포천 지역은 고구려 세력과 대치하는 접전 지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포천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은 고모리 산성, 반월성을 비롯한 지역 내의 옛 성터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포천 지역에서 확인되는 옛 성터는 대개 백제의 대고구려 방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고모리 산성은 백제 초기의 큰 성으로서 성동리산성이나 고소성 등과 함께 고구려군이 남양주[광릉-퇴계원-구리]를 거쳐 아차산성과 풍납토성에 이르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에서 축성하였다. 북쪽 방면에서 오는 남침 세력이 우회하지 않고 서울 방면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서쪽의 국도 43호선과 남쪽의 의정부~광릉 사이의 지방도 413호선 그리고 동쪽의 비득재를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성동리 산성은 포천 방면으로 내려오는 병력을 지연시키기 위한 반월성의 전방위 성으로 철원~운천 방면의 통제와 도평리-야미리로 이어지는 이동 방면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해 축성되었다. 그리고 대전리산성은 동북쪽 연천 방면에서 내려오는 병력의 차단을 위해 축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포천 지역 산성의 종선은 철원 방면에서 남하하는 고구려군과 북한산성에서 철원 방면으로 진출하는 신라군이 충돌하던 주요 교통로였던 것이다.

경기도 포천지역은 5세기 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이 지역의 ‘마홀(馬忽)’이라는 지명은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대두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5, 「신라지」에는 757년(경덕왕 16)에 ‘본래 고구려의 마홀군’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고 지금[고려]의 ‘포주’라는 식으로 포천의 지명 변천과 위치를 수록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권37, 「고구려지」에서는 ‘비성군(臂城郡)[마홀(馬忽)]’이라는 군현 명을 언급하였다. 이 밖에 『고려사(高麗史)』「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견성읍지(堅城邑誌)』, 『포천군 읍지(抱川郡邑誌)』등 여러 문헌에서도 포천의 지명 변천과 관련하여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마홀은 1995년 반월산성 6차 발굴 기간 중 반월산성에서 출토된 기와에 새겨진 “마홀수해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란 명문(銘文)으로 고구려 때 포천의 지명이 마홀이었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다. 곧 포천 지역이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을 때에 마홀군이었으며, ‘내을매현(內乙買縣)’과 ‘양골현(梁骨縣)’을 속현으로 두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는 685년(신문왕 5)에 지방 제도를 개편하여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정비하였다. 당시 포천 지역은 한산주 마홀군으로 편제되었고 그 아래 영현(領縣)으로 내을매현양골현의 2현을 두었다. 그 뒤 757년(경덕왕 16)에 한화 정책(漢化政策)이 단행되어 종래 사용하던 행정 구역 명칭을 중국식으로 바꾸면서, 마홀군견성군으로 개칭되었고 그 영현 또한 각각 ‘사천현(沙川縣)’과 ‘동음현(洞陰縣)’으로 고치게 되었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 들어와 940년(태조 23)에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포천을 포주로 개칭했고, 995년(성종 14)에는 십도제(十道制)를 채택하여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1005년(목종 8)에 단련사를 폐지하고, 1018년(현종 9)에 양광도(楊廣道) 양주군(楊州郡)에 이속되었으며, 1172년(명종 2)에 다시 양주군에서 분리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경기(京畿)의 확대로 좌·우도로 분리됨에 따라 양광도에 속해 있던 포주는 경기좌도에 이관되었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가 되어 1413년(태종 13)에 팔도제(八道制)의 실시와 더불어 포천현(抱川縣)이라 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포천, 영평을 합쳐 도호부(都護府)를 두고 감영(監營)을 설치했다가 다시 1623년(인조 1)에 포천과 영평이 분리되어 양주진관(楊州鎭管)에 소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에 의한 지방 관제의 개정에 따라 영평현포천현에 병합되고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이듬해인 1896년(고종 33)에 포천군에서 영평이 다시 분할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국권을 잃어버리게 됨에 따라 1914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 총독부령을 발동하여 대대적인 지방 제도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영평이 다시 포천군에 통합되었다.

[현대]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이했으나 미·소 양군의 진주와 함께 3·8선을 분계로 한 국토 분단의 비극은 포천을 두 동강으로 만들었다. 창수면, 청산면, 영중면, 일동면의 일부와 영북면, 이동면은 소련 군정 하에 들어가고 포천군은 나머지 10개 면 67개리를 관할하며 미군정 치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 받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포천군청은 한때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9·28 수복으로 10월 14일 복귀하였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침공으로 다시 철수했다가 6월 24일 복귀했으나 청사가 전소되어 포천면 어룡리에 임시 청사를 두었고, 11월 14일에 현 시청 소재지인 포천군 신읍리로 이전하였다. 당시 포천군의 행정 구역은 10개 면 67개리로 구획되었다. 1951년 UN군의 북진으로 38선 이북 지역의 5개 면을 탈환 수복하여 행정권을 이양할 때까지 북포천이라 하여 북포천군수를 두었다가 1954년 11월 17일 수복 지구 행정권 이양으로 포천군은 12개 면 88개 리로 구획되었다.

1963년 5월 10일 내촌면 화현출장소(花峴出張所)를 설치하고, 1973년 7월 1일 행정 구역 개편으로 포천면 탑동리가 양주군 동두천읍으로 이속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에 포천면이 포천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 15일 연천군 관인면 일원이 포천군에 편입되었고, 청산면의 삼정리·갈월리·금동리·덕둔리 등 4개리가 신북면에, 청산면의 초성리·대전리·장탄리·궁평리·백의리 등 5개리가 연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청산면이 연천군 관할이 되었다. 화현출장소는 화현면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1월 1일 관인면 부곡리가 연천군 연천읍으로 편입되었으며, 1996년 2월 1일 소흘면소흘읍으로 승격되었다.

2003년 10월 19일 대통령령 제6928호에 의해 도농 복합 시로 승격하여 포천시가 되었다. 포천읍은 포천동선단동으로 분리되었다. 행정 구역은 14개 읍·면·동[1읍, 11면, 2동]으로 구성되었다. 2012년 1월 1일 현재 포천시의 인구는 6만 6527세대 15만 7967명으로 남자가 8만 2751명[52%], 여자가 7만 5216명[48%]이다. 총면적은 826.44㎢[서울의 1.4배, 경기도의 8.1%]이다.

[위치]

포천시는 경기도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경위도상으로 남단 북위 37° 36´ 에서 북단 북위 38° 11´에 걸쳐 있고, 서단 동경 127° 05´에서 동단 동경 127° 27´에 걸쳐 있다. 남북 연장이 47㎞이고, 동서의 연장이 30.8㎞이며 시청 소재지는 위도상으로 북위 37° 53´, 경도상으로 동경 127° 12´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광주산맥의 주축을 이루는 백운산[940m]·국망봉[1,168m]·강씨봉[830m]·현등산[935m]·주금산[813m]의 연봉을 경계로 강원도 화천군 및 경기도 가평군과 접해 있고, 북쪽은 광덕산[1,046m]·명성산[923m]·금학산[947m]의 연봉을 경계로 강원도 철원군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지장봉[877m]·종현산[588m]을 있는 연봉으로 경기도 연천군 및 동두천시와 경계를 이루어 천보산맥을 경계로 경기도 양주시와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축석령·운악산[936m]을 경계로 경기도 의정부시·남양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등 8개 시·군에 둘러싸여 있다.

[교통]

포천은 예로부터 동북 지방으로 통하는 대로였다.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등 동북지역의 물산을 받아들여 한양으로 넘겨주던 중개지가 바로 포천이다. 동북대로는 통북대로(通北大路), 북관대로(北關大路)로도 불리었다. 서울 수유리에서 출발해 누원(樓院)[다락원]→축석령(祝石嶺)→송우(松隅)→포천(抱川)→만세교(萬歲橋)→영평의 양문역(梁文驛)→풍전역(豊田驛)→철원(鐵原)→원산(元山)을 거쳐 함경도 경흥(慶興)까지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포천은 조선 시대 태조 이성계의 발상지인 동북 지방의 대통로였으므로 이성계가 함흥에 왕래할 때 얽힌 여러 가지 일화가 곳곳에 많이 남아있다. 현재 서울~원산을 잇는 국도 43호선이 서울에서부터 의정부를 거쳐 포천의 중심부를 지나 강원도 철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부에는 청량리에서 구리시를 거쳐 퇴계원을 지나 포천시의 내촌·일동·이동을 통과하여 김화로 이어지는 국도 47호선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연천의 전곡과 동두천시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가평·춘천으로 통하는 국도 37호선과 지방도가 발달되어 있어 매우 편리하다. 버스로 포천시에서 서울[45㎞]까지는 1시간 이내, 의정부시[23.9㎞]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된다.

[문화 유적]

경기도 포천지역에는 한성 백제 시대 주거지가 고모루산을 의지하면서 포천 평야에 있었고 청동기 시대 부족 국가의 실력자가 살았다는 고인돌의 현장으로서 동·서·남·북 관통의 주요 거점에 고모루(古毛婁)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고모루성은 소흘읍 고모리산[380m]일대에 위치한 타원형으로 된 포곡형 토축 산성이다. 이곳은 당시 마한 지역으로 마한왕(馬韓王)이 북쪽의 말갈(靺鞨)의 침범을 대신 막으라고 온조왕에게 내준 땅이었다. 온조왕은 즉위 26년인 서기 8년 세가 약해진 마한을 병합한 뒤 많은 성을 쌓았다. 그 중의 하나가 고모루산성이다.고모루성은 북쪽 방면에서 오는 남침 세력이 우회하지 않고 서울 방면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서쪽의 국도 43호선과 남쪽의 의정부와 광릉 사이의 지방도 413호선 그리고 동쪽의 비득재를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백제계 토기와 북쪽으로 마주보이는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산 5-1번지반월성(半月城)에서 출토된 백제 성벽이 처음으로 축조한 국가가 백제임을 밝혀주고 있다. 포천의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는 지석묘가 두드러진다. 금현리[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304-10자작동·수입리의 지석묘는 모두가 웅장하다. 이 외에도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영송리 158-2번지영송리 선사 유적, 가산면 방축리 산16-1번지화산 서원, 군내면 구읍리 176번지포천 향교 등이 있다.

[산업]

동북대로 중에서 경기도를 지나 강원도 평강(平康)에서 부터 함경남도 안변(安邊)까지의 140리 길을 삼방로(三防路)라 불렀다. 삼방로를 이어받아 한양으로 향하는 포천천 길은 소흘면에 위치한 축석령(祝石嶺)을 만난다. 소흘면 송우리는 동북 지역의 유통 중심지 원산(元山)에 모인 동해의 어물[대표적인 것이 북어다], 삼베, 임산물, 그리고 소가 이 길을 타고 내려와 한양 입성을 앞두고 축석령을 넘기 전에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그래서 송우(松隅)는 주막거리, 장터, 역(驛) 시설을 갖추고 상인과 여행객을 맞이하던 곳이다. 송우장에서 활약한 도매상인 송우도고(松隅都賈)들은 원산도고나 북상(北商)으로부터, 그리고 중간 통과지에서는 강원도 통천(通川)의 상인들로부터 물품을 받아 서울 대상(大商)들에게 넘기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연결선은 경강변에서 동작진으로 연결되는 선과 삼남 지방에서 송파장으로 연결되는 선이 구성되어져 서울 주변의 상권을 장악하고 나아가서는 서울 시전 상인들과 경쟁하기에 이르렀다.

1918년 조사에 따르면 당시 전국의 우시장 655개소 중 1만 마리 이상 거래된 시장은 12개 장시가 있었는데, 3·8일에 장이 서는 포천 ‘읍내장’과 다음날인 4·9일에 여는 ‘송우장’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 만큼 포천장과 송우장의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포천 이동 갈비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이러한 데 까닭이 있었다. 한편, 1600년 경에는 축석령에서 은(銀)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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