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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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郭 |
영어음역 | Seonggwak |
영어의미역 |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집필자 | 백종오 |
[정의]
전통시대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흙이나 돌로 구축된 방어 시설.
[개설]
용인은 조선시대의 용인현을 계승한 지명으로 고려시대에는 용구현과 처인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중 용구현은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구성현 혹은 멸오(滅烏)라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 때 거서(巨黍)로 고쳐졌다가 고려 초에 용인으로 바뀌었다.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고구려가 구성현을 차지하기 이전에는 한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백제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용인은 동쪽으로는 양지까지 25리, 서쪽으로 수원까지 13리, 남으로 양성까지 50리, 북쪽으로 광주까지 15리가 되는 범위를 관할하였다. 따라서 용인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교통의 요충지로서 조선시대에는 구흥역과 금령역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성곽과 봉수가 운영되었다. 현재 용인 일대에 남아 있는 성곽으로는 할미산성·보개산성(석성산성)·태봉산성·처인성·행군이토성·임진산성 등이 있는데, 축조된 시기는 고대 삼국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다양하다.
[삼국시대]
용인 지역에서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성곽은 할미산성과 석성산성으로도 불리는 보개산성, 그리고 태봉산성, 행군이토성 등이다. 이들 고대 성곽들은 대부분 경안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통로상에 분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의 북방 진출로에 해당하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최근 용인 지역에서 새롭게 확인되는 많은 수의 백제와 신라시대 유적의 밀집분포 양상으로 볼 때, 고대 삼국시대 한강 유역을 둘러싼 치열한 접전 과정을 밝혀 줄 수 있는 역사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할미산성은 기흥구와 처인구 포곡읍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349.3m의 백현이라 불리는 산 정상부에 있다. 할미산성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기록을 보면, 일제강점기인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고려 때 한 늙은 할미가 있어 하룻밤에 축조하였다는 데서 이름”하였다고 그 유래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할미성에서 수습된 토기와 도기편 등을 보면 대체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친 유물들이 섞여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이웃해 있는 보개산성에서 나온 유물들보다 오래된 것들이다. 또한 성의 축조방식에서도 고대적 축성법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이른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할미산성과 이웃해 있는 보개산성 역시 처음 축조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무너진 서쪽 성벽의 안쪽으로 박혀 있는 겹축된 석재 틈으로 신라시대 기와 조각이 들어 있고, 성의 정상부에서 나오는 유물들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현재의 규모로 증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처인구 원삼면 좌항리 동쪽에 솟은 태봉산[해발 308m] 정상부를 중심으로 축조된 태봉산성은 테뫼식 토축성이다. 이곳은 삼남 지방의 교통로가 죽산 지역에서 모여 한성으로 향하는 중간 지점의 고갯길에 해당한다. 백제시대 타날문토기류가 다량으로 수습되며, 일부 고려시대 도기편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 있는 행군이토성은 축조 방법과 유물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처음 축성되었다가 고려시대를 거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수축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
용인 지역에서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은 고려 후기의 대몽항쟁기 때 처인성 전투로 유명한 처인성이다.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된 처인성은 고려시대 수주(水州)[지금의 수원]에 속해 있던 처인부곡의 토성으로, 당시 성곽 둘레는 425m였다. 고려시대에 처인성이 무슨 이유로 축조되었고, 어떠한 형태와 구조였는지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에 토축된 주위는 3리였으나 이미 성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였고, 다만 군창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잔존하는 성의 길이는 250m 정도이다.
[조선시대]
수지구 풍덕천동 산 37번지와 기흥구 보정동 산 82-2번지 일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임진산성은, 1997년에 경기도박물관에 의해 처음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임진산성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대규모의 전투가 이루어졌으며 조선군과 일본군의 주둔지로 사용될 만큼 중요한 전략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임진산성은 임진산성지·풍덕천동성지·예진산성지 등으로 불렸으나 조선 중기와 후기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아마도 임진산성과 광교산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임진산성에 관한 기록이 처음 보인 것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로, 여기에 “구릉상의 땅을 고른 것인데, 주위는 약 50칸으로 풍덕천 진지라고 칭하며 임진왜란 중에 일본군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러나 경기도박물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총통·철제탄환·철모 외에도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류와 백제시대의 타날문토기, 조선시대의 명문도자기류 등이 발견되었다.
이런 유물들과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등에 있는 내용들로 미루어, 임진산성은 청동기시대부터 초기 백제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는 복합 유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일시적으로 쌓은 성이라기보다는 조선시대까지 관방시설로서 기능해 온 유적으로 추정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