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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985
한자 李忠武公-
이칭/별칭 이충무공자당기거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신월로 195[웅천동 1849]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2016년 2월 23일연표보기 -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 준공
문화재 지정 일시 2013년 6월 24일연표보기 -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 여수시 기념물 제1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8월연표보기 -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5호 지정
소재지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 - 전라남도 여수시 신월로 195[웅천동 1849]지도보기
성격 기념물|건물
지정 면적 1,266㎡
소유자 여수시
관리자 여수시 문화예술과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정의]

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이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어머니와 가족을 피난시킨 거처.

[개설]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변씨 부인이 임진왜란 때 5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는 노모에 관한 기록이 88일 분이나 있어 그 효성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난중일기』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년째인 갑오년 정월 노모와 설을 같이 지내며 “어머님을 뫼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생신인데도 전쟁 중이라 직접 가서 뵙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도 적고 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고 투옥된 뒤 노모가 고음천(古音川)[현 전라남도 여수시 신월로 195,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에서 소식을 듣고 선편으로 아산 고향으로 올라오는 도중 풍랑까지 만나 고통 끝에 여든두 살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의 애달픈 마음 등이 잘 드러나 있다.

[변천]

임진왜란 당시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그 터에 1930년께 지은 기와집에서 정대수 장군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이충무공 자당 기거지’로 부르다가 2013년 6월 24일 여수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하면서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여수시에서 정대수 장군의 후손으로부터 집을 사들여 2014년부터 2015년까지 보수를 하고 2016년 2월 23일 준공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사랑채와 관리실 등 부속 건물이 있다.

[위치]

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에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은 부인에게 충청도 아산의 본가를 맡기고 일흔일곱 살의 노모[변씨 부인]를 전라좌수영 근교 고음천에 모셨다. 이곳은 원래 충무공의 군관으로 효성이 지극한 정대수의 초당으로, 전라좌수영에서 20리 남짓 떨어져 있어 노모의 안후를 살피기 쉬운 거리였다.

[현황]

2021년 8월 전라남도 지정문화재[문화재자료 제295호]로 지정되었으며, 여수시에서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에 문화관광해설사와 관리자를 파견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 일가의 행적과 이순신 장군의 효성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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