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018
한자 炭鑛村- 生活 文化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유희

[정의]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에 영월광업소의 상징성을 기반으로 개관한 박물관과 탄광촌 생활.

[개설]

강원도탄광문화촌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 지역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2009년 10월 개관하였다. 강원도탄광문화촌은 강원도에서 최초로 개광한 영월광업소를 상징적인 기반으로 하는 박물관이다. 영월광업소는 1935년 개광하였으며 강원도 최초의 광업소이다. 영월광업소는 대한민국에서 석탄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지역인 강원도에서 개광한 최초의 광업소라는 점에서 그 상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산업 동력이자 생활 동력인 석탄 생산에 있어서 영월광업소는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영월광업소의 위상은 역대 대통령이 가장 많이 다녀간 광업소라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영월광업소는 1950년 11월 대한석탄공사가 창립되면서 석탄공사 산하 광업소로 운영이 된다. 대한석탄공사는 최초 9개 광업소를 바탕으로 자본금 1000만 원으로 시작하였고, 강원도 태백과 도계, 전라남도 화순에 광업소를 운영하여 석탄광을 개발하고 무연탄을 직접 생산 및 공급함으로써 현재에도 국내 무연탄 수급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

[영월광업소의 시작과 지질 조사]

영월광업소는 1929년 조선총독부 선광연구소에서 실시한 영월 지역의 지질 조사를 토대로 개발되었다. 한반도에 대한 지질조사에 대하여서는 미국인 지질학자 라파엘 펌펠리(Raphael Pumpelly)가 1862년에서 1865년 사이에 극동지역 일대[중국 북부와 만주, 몽고 및 한국 등]의 지질을 조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반도 지질조사의 효시로는 독일인 지질학자 칼 고트쉐(Carl. C. Gottsche)가 1886년 발표한 「조선국 지질개요」를 꼽는다. 1883년 한·독 통상조약이 체결된 뒤인 1884년 동경제대 지질학과 강사였던 칼 고트쉐는 한국을 11개월 동안 답사하여 「조선반도지질답사기」를 작성하여 1886년 베를린 왕립대학 학술회보에 「조선국 지질개요」로 발표한다. 이후 1891년 영국인 홀랜드(T. H. Holland)에 의하여 한국의 암석에 관한 연구 결과가 발표된다. 또한 러시아의 지질학자 류벤트호프도 북한 지역 광물을 조사하여 그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한반도에 대한 지질 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00년부터 1902년까지 3년간이며 동경제대 고토오[小藤] 박사는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전역에 대한 지질 조사를 실시한다. 고토오 박사는 8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하면서 한국 지질 연구의 기초자료를 제공하였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통감부에 한국광산조사대가 결성되었고 이노우에[井上禧之助] 박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10명의 학자들은 1904년 12월부터 1906년까지 한반도 광산 조사를 실시하여 『한국광업조사보고』 전6권[농상무성, 1906]을 간행하고 조선지질도[40만분의 1 지도]를 제작하였다. 한편, 통감부 광산조사대와는 별도로 1905년 11월 대한제국은 농상공부 산하에 광상조사기관을 설치하여 평양 지역 무연탄광과 함경북도, 경상북도 신생대 제3기 탄전 등을 일본인 교지베[巨智部忠承] 박사와 다무라[田村英太郞] 학사를 초빙하여 조사하였다. 교지베는 1908년 『지질학』 잡지 제15권에 「평양 사근탄층 개설」을, 다무라는 1910년 농상공부 공무국에서 간행한 『광상조사보고서』 제1호에 「한국석탄 및 석문산지 일부분 조사보문」을 발표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는 농상공부 광무국 광무과 내에 광상조사부문(광상조사반)을 설치하고 1911년부터 1917년까지 한반도 전역에 걸친 광산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는 효과적인 자원 수탈을 위하여 계획된 것으로 7년에 걸친 조사 결과는 1917년 「조선광상조사요보」와 「조선광상조사보고」로 각각 출간되었다. 광무국과는 별도로 조선총독부 식산국의 나카무라[中村新太郞]는 1914년 강원도 남부 산악지대의 지질조사 결과를 보고하면서 삼척, 영월, 정선, 강릉 등 4개 지역에 탄전이 있음을 밝혀낸다. 1911년 이러한 광상조사와 지질조사에 앞서 총독부는 전국의 석탄 산출지를 조사하여 조선 석탄 자원 개발의 기초로 삼고자 하였다. 당시 조사 대상은 전국 11개도 84개소였고, 지역별로 보면 경기 3개소, 강원 3개소, 충남 2개소, 전남 1개소, 경북 10개소, 경남 3개소, 황해 5개소, 평남 24개소, 평북 6개소, 함남 7개소, 함북 20개소 등 절반 이상이 평남과 함북에 편재하였다. 이때 조사 대상이 된 84개소의 석탄 산출지에 대한 정보는 과거 문헌, 지방관의 보고, 소규모 영세탄광들에 대한 파악 등 가능한 모든 것을 취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일제가 실제 탐사를 바탕으로 하여 취합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한반도 전역에 석탄 산출지가 분포되어 있음을 알려 주었고, 이후 실제 실시된 탄전조사의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조선총독부 광무국의 광산조사 활동 종료 후, 1918년 5월 일제는 한반도 광물자원의 체계적인 수탈을 위해서 광산조사를 제도화한다. 지질조사소를 설치하고 5만분의 1 지질도 작성을 시작하여 1938년까지 총 19집의 지질도를 제작한다. 1922년 조선총독부 식산국은 연료선광연구소를 설치하여 석탄 탐사를 본격화한다. 연료선광연구소는 3개의 전선(全鮮)탄전조사반을 구성한다. 1923년 이시쿠라[石倉]와 다데이와[立岩] 등 2명의 일본인 기사와 여러 명의 기술원으로 구성된 제1반은 평안도 지방에 대한 조사부터 착수하였고, 제2반과 제3반도 전국 탄전지대를 순차적으로 실사하였다. 조사 방법은 기존의 지층 조사에서 나아가 시추, 갱도 탐사 등 과학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조사의 결과, 1940년까지 모두 14권에 이르는 『조선탄전보고』가 작성된다. 『조선탄전보고』 자료는 광복 이후까지 한반도 석탄 개발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탄광의 개발은 북한 지역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남한 지역의 탄광 개발로 이어졌다. 남한 지역의 탄광은 탄층의 변화가 심하고 채탄 조건도 열악하였다. 남한 지역에서 가장 먼저 개광한 탄광은 경북 문경에 위치한 문경탄광이다. 총독부가 1926년 철도용 탄의 국내탄 사용을 지시하며 개광된 문경탄광은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문경탄광은 1927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돌입하였다. 문경을 시작으로 1931년 전남 화순의 구암탄광이 개광되었고, 1935년에는 영월탄광, 1936년에는 남한 최대 탄광인 삼척탄광, 1938년에는 문경탄전의 일부인 은성탄광 등 남한 지역 탄광이 순차적으로 개광되었다.

영월탄광소의 영월탄은 조선전력회사 영월발전소의 발전용 탄으로 공급되었는데, 탄광에서 발전소까지 12㎞ 구간에 공중 삭도를 건설하여 석탄을 발전소로 수송하였다. 영월탄광은 비교적 소규모였으나 탄광 인근에 소비처가 있었고 수송에도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개발이 이어질 수 있었다.

[한국의 근대적 석탄 개발과 영월탄광소]

한국에서 언제부터 석탄을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사료는 없다. 대한민국 최초 석탄 흔적은 609년 경북 영일군 갈탄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석탄과 무연탄이란 용어는 조선 선조 23년(1590)에 평양관찰사 윤두수(尹斗壽)[1533~1601]가 지은 『평양지(平壤志)』에 처음 제시된다. “성 동쪽 10리 지역의 문수봉(文繡峰)에 석탄소(石炭所)가 있는데, 정동 10리 예미현 및 동북쪽 30리 지역의 고방산 등지에 모두 석탄이 있고, 불이 붙어도 연기가 나지 않으므로 무연탄(無煙炭)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석탄 사용 기록은 1730년 평양부 동쪽 미륵현에서 등장한다. 한국의 근대적 석탄 개발은 1896년 4월 러시아인 니시첸스키(Nisichensky)가 함경도 경성과 경원 지방의 석탄 채굴권을 취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1868년부터 근대적 채탄이 이루어진 일본보다 30년, 1875년 탄광 개발에 착수한 중국보다는 20년 늦은 것이었다. 왕실이 최초로 석탄 채굴을 허가하였다는 점에서 국내의 근대적 석탄 산업의 효시로 본다. 이전에도 석탄 생산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생산량이 미미하였고 실제 개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개발로 보지 않는다. 왕실의 개발권 허가는 1906년 6월 29일 「광업법」이 제정되며 소급하여 광업권 등록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1896년 경성과 경원 지방의 석탄 채굴권 허가를 한국 석탄산업의 기원으로 본다.

석탄 채굴권 취득은 경성과 경원 지방이 먼저였으나 실제 개발에 착수한 것은 평양광업소가 최초였다. 이것은 1903년 1월 궁내부 내장경 이용익이 프랑스 용동상회(龍東商會)와 ‘평양 사동탄광’에 대한 합동 개발 계약을 체결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 용동상회는 평양 사동탄광 개발을 위해 프랑스인 3명을 기술자로, 한국인과 중국인을 광부로 고용하였다. 생산된 석탄의 대부분은 중국 산동 지방으로 수출되었고, 프랑스는 군함용으로 사용 가능한지 여부를 점검하기 위하여 시료를 본국으로 보냈다. 최초의 개발은 산림 벌채, 생산 부진, 평양성곽 훼손 등의 문제로 개발 2년 만인 1905년 2월에 채굴이 중지되고 4월에 계약이 해지되면서 중단되었다. 계약 해지 후 평양 탄광 운영권은 왕실로 귀속되었다가 「광업법」 제정 후인 1907년 평리원 재판장이었던 민병환의 풍고[豊串]회사에 의하여 개발된다. 이후 정부 직영으로 전환되어 농상공부 대신 송병준이 총재를 겸임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운영하게 된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1915년 12월 제령 제8호로 「조선광업령」을 제정하고 1916년 2월 「조선광업령시행규칙」과 「조선광업등록규칙」을 제정하여 4월 1일부터 시행함으로써 한국에서의 자원 수탈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일본의 자원 수탈은 본격화되어 1922년 4월 평양광업소 생산권은 일본 해군성으로 이관되었고 명칭도 해군연료창 평양광업부로 변경된다. 1925년부터는 생산탄에 대한 외국 반출이 금지되더니 1937년부터는 일본 해군 기밀로 분류되어서 생산량에 대한 발표가 중단된다. 평양탄광은 국내 석탄산업의 중심이었고, 당시 국내 굴지의 탄광 개광에는 평양광업소의 인력이 참여하였다. 광복 후에도 평양탄광소에서 근무하였던 한인 기술자와 기능공이 대거 월남하여 남한 지역의 탄광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한국에서 석탄의 생산은 1924년까지 서서히 증가하다가 1925년부터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1928년부터 급증하였다. 석탄은 한국의 근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주요 자원이었지만, 일제 강점기 석탄은 주요한 수탈 자원이 되었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석탄 산업이 형성되었고, 이와 더불어 탄광촌은 농촌이나 어촌 등의 다른 공동체와는 다른 유형의 공동체로 형성되었다. 강원도에서 탄광촌으로 꼽을 수 있는 곳은 태백, 삼척, 정선, 영월 등이다.

[한국의 광산 인력과 탄광촌 생활]

개광 초기에 석탄의 생산은 사람의 힘에 의존하였으며, 탄광업은 기피 업종이어서 여타 농업이나 비금속 업종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제시해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기술자는 거의 일본인이고 노동자는 대부분 한국인이었으며, 일부 중국인과 극소수의 일본인이 노동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인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산동성 출신이 많았고 합숙소 생활을 하였다. 1920년대 탄광에 종사한 광부의 구성은 출신국별로 살펴보면, 한국인 90%, 중국인 9%, 일본인 1%이다. 중국인 광부는 대개 갱외 운반부로 종사하였고, 일본인 광부는 큐슈 지방 탄광에서 종사하던 숙련부들이 많았다. 일본인 광부들은 채탄막장에서 채탄 작업을 지시하거나 감독의 조수 역할을 하며 한국인 광부들에 대한 관리자 책임을 맡았다. 1930년대 초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한반도 남부 지역의 계속된 흉년과 막대한 쌀 공출로 인하여 기아문제가 발생하자, 총독부는 탄광 이주 정책을 실시하였다. 광활한 만주의 미개간 지역으로 조선인을 이주시키고, 만주보다 안정된 한반도에는 일본 농민을 이주시켜 자리 잡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주 정책에 따라 총독부는 경상도 지역의 주민을 만주와 중국 서북 지방으로 집단 이주시켜 농사짓게 하고,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의 이재민 다수를 함북 회령의 유선탄광, 평남 대동군의 삼신탄광, 당시 개발 중이던 강원도 삼척탄광 등 탄광 지역으로 이주시켜 부족한 탄광 노무자 문제를 해결하였다. 탄광 이민 정책은 이주민의 입장에서는 당시 굶주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이후 태평양전쟁으로 인하여 징용이 시작된다. 일제는 전쟁을 위해서 더 많은 석탄이 필요해졌고, 일제는 강제 징용을 통하여 석탄 남획을 강행한다. 일제의 수탈 정책에 의하여 탄광촌은 단기간에 시설 확충이 이루어진다. 전기가 들어오고 대규모 사택단지가 조성되면서 생필품의 유통 등이 이루어졌지만 한국인 광부들은 전시체제 하에서 거주지 내 제한된 생활을 하게 된다. 일제의 감시 체제 아래에서 탄광촌 생활은 집단 강제 노동수용소와 다름 없는 생활이 되었고, 이러한 생활은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이어진다.

1945년 광복 이후 탄광은 운영상 어려움을 겪었다. 운영 핵심 인력인 일본인의 철수와,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있던 근로자들이 대거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한 갱도의 붕괴, 파괴 및 훼손이 이어졌다. 탄광촌 주민들은 이런 상황에서 물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 후 정부는 석탄증산을 위하여 탄광 복구비를 투입하였다. 삼척탄광에 8억 3900만 원, 함백탄광에 11억 7600만 원, 영월탄광에 5억 2400만 원을 투자하였다. 복구 지원비 총액이 30억 4400만 원이었으니 대부분이 삼척, 함백, 영월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상공부 광무국은 1948년 각 도의 귀속 광산을 중앙 정부로 이관시키면서 「귀속재산처리법」에 따라 덕대인 제도를 도입하였다. 민간업자에게 소정의 덕대료를 받고 광산을 개발하고 채굴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덕대인 제도를 도입하기 전 가행 탄광은 20여 곳에 불과했으나 제도 시행 후 1951년 121개 광산에 무려 200여 광구가 개발되었다. 정부 또한 석탄산업의 개발과 관리를 위하여 국영 기업인 대한석탄공사를 1950년 11월 설립하였다. 휴전 이후 연료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는 1954년 6월 2일 국제연합한국재건단과 「탄광개발협정」을 체결하여 1958년 국제연합한국재건단 철수까지 총 1495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석탄 증산을 위해서는 산업철도부설이 이루어져야 하였고, 이에 따라 영암선[영주~철암] 86.4㎞가 1955년 개통되었고 함백선도 1957년 3월 9일 개통되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증산 정책으로 1956년 181만 톤이었던 생산량은 1967년 1244만 톤으로 증가하였다. 1950년대 말부터 보급된 연탄으로 인하여 민수용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으로 산업용으로도 수요가 증가하였다.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는 에너지원 자급자족을 목표로 석탄 증산에 매진하였지만 1966년 10월에 ‘연탄 파동’을 겪으면서 석탄 생산은 전성기를 마감하게 된다. 연탄 수요는 늘어갔지만 공급이 이를 받쳐 주지 못하고 10월 한파가 몰아닥쳤다. 정부는 11월 16일 대통령령으로 무연탄 대신 벙커C유로 대체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목욕탕, 이발소, 미장원, 숙박업소, 다방 등 영업소에서 연탄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이는 수많은 탄광이 문을 닫는 계기가 된다. 1967년 초 200여 개의 탄광이 1969년에는 50여 개로 감소하게 된다. 석탄 사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탄광촌 사람들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지원 대책의 일환으로 1969년 8월 「석탄산업 육성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어 보조금 지급이 시작된다. 「석탄산업 육성에 관한 임시조치법」은 제1차,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하여 1986년 12월 31일까지 연장되어 시행된다. 2000년에는 석탄 생산이 415만 톤으로 줄어들었으며, 1989년부터는 폐광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988년 347곳 6만 2259명에 달하던 탄광 근로자들은 1995년 27곳 1만 1735명으로 축소되었다. 탄광이 감소하자 탄광 도시들의 인구 수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 석탄산업은 연평균 15%씩 빠른 속도로 감소하였다. 정부는 1995년 4월 6일 「석탄산업 종합대책 추진계획」을 발표하면서 속도 조절에 나섰다. 또한 정부는 장성, 도계, 화순 광업소를 비롯하여 동원, 삼척, 경동, 한보 등 7개 대형 탄광과 태서, 태맥, 마로, 영월 등 4개 중소탄광을 장기육성 탄광으로 지정하였다. 1995년 12월에는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카지노를 허가하여 강원랜드가 2000년 10월 개장하였다.

[강원도탄광문화촌]

강원도탄광문화촌은 영월광업소의 상징성을 기반으로 하여 2009년 10월 영월군 북면 마차리 지역에 개관한 박물관이다. 강원도탄광문화촌은 여타의 ‘태백석탄박물관’이나 ‘사북유물보전전시관’처럼 시 또는 읍 단위의 명칭을 쓰지 않고 ‘강원도’, 도 단위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강원도탄광문화촌’이라는 명칭은 강원도 최초의 광업소라는 상징성에 대한 자부심을 구현한 것이다.

강원도탄광문화촌은 1935년 개광하여 대한민국 석탄 생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영월광업소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탄광촌 사람들의 삶을 복원한 문화유산 공간이다. 탄광이 번성하던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영월군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6만여 명이 마차리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1972년 영월광업소가 폐광되고 1980년대 들어 석탄산업이 사양화되면서 대부분 탄광마을은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져 갔다. 이에 지자체에서는 탄광의 모습을 재현하고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고자 2009년 10월 20일 강원도탄광문화촌을 개관하였다. 강원도탄광문화촌은 대한석탄광업소의 1호 광업소였던 영월광업소가 있던 자리에 조성되어 개관되었다.

강원도탄광문화촌은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또한 실제 탄광촌 삶과 관련된 다양한 전시물을 전시함으로써 영월 지역 탄광촌 사람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감각할 수 있도록 하는 체험 학습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강원도탄광문화촌은 탄광촌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탄광마을 생활관, 국내 1호 탄광 갱도를 활용한 탄광갱도체험관, 굴진과 발파, 동발 설치, 막장 작업장 등 현장 체험이 가능한 탄광문화 현장학습장을 함께 갖추고 있다. 탄광마을 생활관, 탄광갱도체험관, 탄광문화 현장학습장의 3개 주제로 구성된 강원도탄광문화촌은 ‘생활상 엿보기, 애환과 번영의 거리, 마차리 공동구역, 마차초등학교, 마을 출구’라는 5개의 소주제로 다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애환과 번영의 거리’에는 ‘배급표 받는 곳, 마차상회, 이발관, 양조장, 마차집’ 등이 있고, ‘생활상 엿보기’에는 ‘광부사택, 양반사택, 공동변소, 공동수도, 사원사택’이 있으며, ‘마차리 공동구역’에는 ‘복지회관, 배급소, 문화관’, ‘마차초등학교’에는 ‘오늘의 수업은, 함께 배워요’ 등의 내용으로 교실이 꾸며져 있다. ‘마을 출구’에는 ‘마차리 버스 정류장, 마차리 탄광촌, 영월의 과거·현재·미래’ 모습이 제대로 나타나도록 실제 버스를 마련하고 있다. 탄광갱도체험관은 석탄 채취 당시 광부들의 희로애락을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갱도 위의 레일, 효과음, 영상, 광부작업복 입어보기’ 등 현장감을 느껴볼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모든 모형과 체험은 실제 막장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으며 광부들이 도시락 먹는 모습까지도 담고 있다. 야외에는 당시 실제 사용하였던 권양기, 환풍기, 인차, 광차, 공기압축기 등의 채탄 장비도 전시되어 있으며, 생활관 뒤편으로는 산업전사 위령탑이 있다. 이외에도 방문객들을 위한 산책로와 야외 공연장이 조성되어 있다.

[강원도 탄광촌문화제]

강원도 탄광촌문화제는 영월군 북면번영회가 주관한 탄광축제로 강원도, 영월군, 광해방지사업단, 강원랜드 등의 후원을 받아 2011년부터 열리고 있는 지역 축제다. 축제는 영월군 북면 마차6리의 ‘강원도탄광문화촌’에서 개최된다.

강원도 탄광촌문화제는 순직근로자를 위한 위령제를 시작으로 막이 오르는데, 사고 순직자 및 진폐·규폐 순직자 제막식, 산업전사위령탑 앞의 헌화와 분향, 진혼무와 헌화무의 살풀이 공연 등이 행사의 핵심을 이룬다. 강원도 탄광촌문화제의 주요 행사로는 광부복을 입고 동발[지주] 세우기 시연, 광부 복장을 갖춘 뒤 동발 메고 달리기 등이 있다. 통나무 동발 빠르게 자르기 경진대회도 주요 행사 중 하나인데, 1회 때는 남녀 팀당 3인 1조로 통나무 통발 빨리 자르기 행사를 토너먼트로 진행하였고, 3회 때부터는 2인 1조로 진행하였다. 관람객 체험 행사로는 광부복을 입고 사진 찍는 포토존, 연탄불 통돼지구이와 소머리국밥 시식 등이 있다. 아이들을 위하여 사생대회, 맨손으로 송어 잡기 등의 행사가 마련되어 있다. 강원도탄광문화촌에서 열리는 강원도 탄광촌문화제는 강원 지역 탄광 전체의 풍속을 반영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