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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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李勉疇旌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의당방축골길 223[용암리 154-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고순영 |
건립 시기/일시 | 1906년 - 효자 이면주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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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97년 06월 05일 - 효자 이면주 정려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30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효자 이면주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9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효자 이면주 정려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30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효자 이면주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의당방축골길 223[용암리 154-1] |
원소재지 | 효자 이면주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의당방축골길 223[용암리 154-1]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전주이씨 문중 |
관리자 | 전주이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9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용암리에 있는 이면주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개항기에 세운 정려.
[개설]
효자 이면주 정려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이면주(李勉疇)[1818~1871]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905년(광무 8)에 명정을 받아 1906년(광무 9)에 건립되었다.
이면주는 이무형(李茂亨)[1793~1861]과 결성장씨(結城張氏)[1789~1832]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전주이씨들은 정종의 10남인 덕천군의 후손이며, 이면주는 덕천군의 13세손이다.
전주이씨들이 공주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상산군(商山君)의 장남 평양령 이요년(李堯年)의 아들인 진주목사 이몽경(李夢慶)[1538~1624]부터였다.
[위치]
장군면 용암1리 마을회관에서 논을 지나 북쪽으로 들어가면 마을이 나온다. 효자 이면주 정려는 마을회관 건너편에 있다.
[변천]
효자로 명정 받을 당시의 입안문(立案文)을 보면 충청도 유생 김태현(金台鉉) 등이 이면주의 효행을 조정에 알렸고,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 남정철(南廷哲)이 정려를 내리자고 주청하여 1905년에 명정 받은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임금이 정문을 내리도록 비답(批答)[조선시대에 신하가 올린 상소, 차자(箚子) 등에 대하여 국왕이 내린 답서]한 내용, 정문을 세울 때 재목과 목수를 관청에서 제공하고 그 자손들의 환곡(還穀) 및 제반 잡역 일체를 면제해 주도록 조치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형태]
정려는 정면·측면 각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 건물로, 다포양식을 갖추고 방풍판을 두었다.
원형 고주석에 원형 기둥을 세웠으며, 4면을 모두 홍살로 처리하되 하단부에는 시멘트로 막았다. 바닥은 시멘트로 보수하였고, 정려 주변에는 낮은 철책을 둘렀다.
[현황]
정려 내에는 명정현판[120㎝×45㎝]이 게재되어 있다. 현판에는 ‘孝子 贈九品從仕郞中學校敎官 李勉疇之門 光武九年七月十九日 命旌閭’라고 쓰여 있다. 명정현판 뒤로 1906년 비서원승 원장례를 지낸 류인철(柳寅哲)이 지은 ‘孝行旌閭記’[54×37㎝]가 있다.
바닥에는 1906년 이상뢰(李象賚)가 세운 정려비(旌閭碑)[144×43×20㎝]가 있다. 전면에 ‘孝子 有明朝鮮贈中學校敎官李勉疇之文 光武九年七月十九日 命旌’이라고 쓰여 있다.
효자 이면주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효자 이면주 정려는 1905년 효자로 명정 받을 당시의 입안문이 남아 있어 청원부터 명정 받기까지의 과정을 잘 알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