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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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秀郁 |
영어공식명칭 | Yi Suu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신정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 이수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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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70년 - 이수욱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이수욱에게 대통령 표창이 추서됨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이수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됨 |
출생지 | 이수욱 출생지 -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신정리[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신정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세종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수욱(李秀郁)[1890~1970]은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신정리 출신으로 전의면 전의시장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이수욱은 1919년 3월 13일 연기 전의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수욱은 고종의 국장(國葬) 참례를 위하여 2월 26일 상경하여 3·1운동을 직접 목격하였다. 서울의 상황을 파악한 후 3월 6일에 신정리로 귀향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귀향 후 추경춘(秋敬春)을 방문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실행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7일 밤에는 박성교(朴聖敎)의 집에서 추득천(秋得天)·윤자벽(尹滋璧)·윤자훈(尹滋勳)·윤상억(尹相億)·김재주(金在周) 등과 회합을 갖고 3월 13일 전의 읍내 장날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3월 8일에는 김병옥(金炳玉) 집에서 정원필(鄭元弼)·이장희(李章熙)·이광희(李光熙) 등과 회합을 갖고 역시 3월 13일에 독립만세운동을 벌이자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시장 군중들에게 나누어 줄 태극기 약 150기(旗)를 자택에서 제작하였다.
이수욱은 3월 13일 오전 9시경 갈정리 고개에서 시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를 것과 다른 사람에게도 권유하여 참여하도록 부탁하였다. 또한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품속에 숨겨 두었다가 자신이 독립운동 연설을 할 때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 각처를 행진하자고 당부하였다. 12시 40분경에 전의시장에 도착한 이수욱은 시장 군중 150여 명 앞에서 독립운동 연설을 하고 독립운동 방법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주장하였다. 사전 약속으로 집합한 추경춘·추득천·윤자훈·윤자벽·윤상억·김재주·정원필·이장희·이광희·윤상원(尹相元)과 시장에서 참여한 이수양(李秀陽)·윤상은(尹相殷)·정상복(鄭相福)·이규영(李奎永)·이상건(李相健) 등은 윤자명(尹滋明)과 윤자벽으로부터 미리 받아 옷 속에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들고 흔들면서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수욱을 선두로 시장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전의 면 각처를 활보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수욱은 독립만세운동을 적극 주도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항소(抗訴)하였으나 경성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1년 6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수욱의 공적을 기리어 1982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追敍)[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하였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