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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의 추천으로 포천 현감이 된 토정 이지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007
한자 住民-追薦-抱川縣監-土亭李之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73년 - 이지함 선조의 명에 의해 탁행지사로 추천 받아 포천 현감으로 부임

[개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1578]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고려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시골로 낙향한 삼은(三隱)[고려 말기 유학자로 이름난 세 사람, 곧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이름] 가운데 한 명이자 고려를 통 털어서 손꼽히는 학자요 재상이던 이색이 6대조이다. 맏형은 인종 때 ‘백의정승’이라는 칭호를 들었던 이지번(李之蕃)이고, 제자로는 조카이자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와 이조판서를 지낸 이산보(李山甫) 등이 있다.

[실용주의적 기인으로 이름을 날리다]

이지함은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형인 이지번의 보살핌과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뒤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스승으로 모셨다. 서경덕은 젊을 때 당시 부패한 정치에 환멸을 느껴 뛰어난 인품과 학문을 갖춘 선비가 벼슬하기 위해 과거를 보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였기에 이지함 역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지함은 평소 구리로 된 갓을 쓰고 다녔는데, 머리에 쓰고 다니다가 목이 마르면 물 떠먹고 배고프면 밥을 짓는 솥으로도 쓰고, 세수할 땐 대야로 썼다. 이렇게 주변 사람의 이목에 구애받지 않고 실용주의적인 성격과 행동으로 당대의 기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지함은 기개와 도량이 비범하고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다. 실록에는 해변에 어버이를 장사지냈는데 조수가 점점 다가오니 언젠가는 무덤이 잠길 것을 염려해서 돌로 제방을 쌓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하늘에 달렸으나,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위해 재난을 막는 계획은 게을리 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평소 욕심을 내지 않고 고통을 견디며, 짚신에 죽립(竹笠) 차림으로 걸어서 사방을 다니며 도학과 명절(名節)이 있는 선비를 사귀었다. 그와 함께 이야기하면 기발하여 사람의 주의를 끌었으나, 혹은 수수께끼 같은 농담을 하며 점잖지 못한 자태를 보이기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포천 현감을 제수 받다]

이지함은 학식이 높았으나 관직에 초연하였다. 그가 관직에 진출한 것은 삼공(三公)이 선조에게 그를 추천하였기 때문이다. 정국이 바뀌어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등장하던 1573년(선조 6) 5월 뛰어난 행실이 있는 선비를 천거하라는 선조의 명으로 탁행지사(卓行之士)를 추천하게 하였는데, 여기에 이지함을 포함한 다섯 명의 인물이 발탁되었다. 이들은 ‘오현사(五賢士)’라고 불렸으며, 첫 벼슬로 파격적 직위인 6품직을 제수 받았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을 보면, “암혈에 은둔한 선비는 신들이 아직 들은 바가 없으므로 감히 논천(論薦)할 수 없으나, 우선 지금 학행(學行)이 두드러지게 알려진 전 참봉 조목(趙穆), 학생 이지함(李之菡), 생원 정인홍(鄭仁弘), 학생 최영경(崔永慶)·김천일(金千鎰) 다섯 명을 초계(抄啓)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관례에 따라 참봉의 말직을 준다면 각별히 거두어 쓰는 뜻에 맞지 않을 듯하니, 참상(參上)의 상당한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아뢰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지함은 특히 천문, 지리, 산수, 술서 등 제가 잡술에 통달하였으나, 평생 벼슬엔 뜻이 없기에 산천 유람과 제자 기르기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특별히 천거되어 56세라는 늙은 나이에 포천현 현감을 제수받는다. 그는 낡은 베옷에 짚신 차림으로 부임하였는데, 관속이 음식상을 차려 오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먹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관리들이 “포천 고을은 변변한 토산물이 없어 죄송합니다. 다시 차려 올리겠습니다.”라고 하자 “나는 잡곡밥에 나물 반찬 하나면 족하노라.” 하였다고 문집인 『토정유고(土亭遺稿)』에 기록하고 있다.

이지함이 포천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딱하게 여겨 애절한 마음을 쓸어 담으며 정성으로 적어 올린 「이포천시상소(莅抱川時上疏)」에는 포천 지역 실상과 이에 대한 타개책이 들어 있다. 이지함은 “포천현의 상황은 이를테면 어미 없는 고아 비렁뱅이가 오장이 병들어서 온몸이 초췌하고 고혈(膏血)이 다하였으며 피부가 말랐으니 죽게 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입니다.[抱川之爲縣者。如無母寒乞兒。五臟病而一身瘁。膏血盡而皮膚枯。其爲死也。非早卽夕。]”라고 하여 당시 포천 지역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절박하고 곤궁한 처지였는지를 호소하면서, “전라도 만경현에 버려져 있는 양초주와 황해도 초도정을 포천에 비지(飛地)로 소속시켜 주면, 고기 잡는 일과 소금 굽는 일을 일으켜 수년 내 수천 석 곡식을 얻어 백성 구제에 힘쓸 것입니다.”라고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건의가 묵살되는 바람에 이지함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아 결국은 벼슬마저 버리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선조실록』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선조 7년(1574) 갑술 8월 1일[임인] 포천 현감 이지함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지함은 원으로 있으면서 스스로의 처신을 검소하게 하고 백성 보기를 자식처럼 하였다. 고을이 빈약하여 곡식이 모자라자 조정에 건백(建白)하여 바닷가 마을의 통발을 자신의 녹봉 대신 받아 곡식을 사서 빈약한 재정을 보충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이 따라 주지 않았다. 이지함은 본디 고을 원으로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곧 병을 핑계하여 사직하고 돌아갔다.”

[맹자의 애민 사상을 실천하다]

이지함의 건의를 받아 주지 않았던 조정에서는 그가 관직에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과 병을 핑계하였다고 적고 있지만, 이지함은 평소 “내게 100리[39.27㎞] 되는 고을을 맡긴다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할 정도로 애민 사상이 투철하였다. 따라서 이런 상황은 진정으로 딱한 백성을 위해 온몸으로 선정을 실천하던 이지함의 마음과 이를 윤허하지 않았던 조정 사이에 얼마나 큰 감정의 공간이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민초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하여 마음으로 담아 올린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앉자 그 답답함이 병이 되어 벼슬을 떠난 것을 보면 그의 애민 사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지함은 백성의 헐벗은 삶을 온몸으로 함께하면서 그들의 가난을 없애 주고자 자신의 녹봉마저 털었고, “재물도 글 못지않게 중요하다. 재물을 업신여기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노라”고 하며 살기 위해서는 재물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이런 이지함의 애민 사상은 맹자의 사상에 근원을 두었다고 하며, 투철한 실천 사상은 뒤에 박제가(朴齊家)의 실학 정신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아산의 인산 서원(仁山書院), 보령의 화암 서원(華巖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사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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