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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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用伊 |
영어공식명칭 | I Yongi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선아 |
출생 시기/일시 | 1868년 - 이용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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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9월 - 이용이, 박춘실을 선봉장으로 삼고 장수읍 함락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이용이 호남 창의 대장에 추대되어 서울 진공 작전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2월 - 이용이 무주 주재소 급습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6월 - 이용이 광주 지방 재판소 전주 지부에서 징역 7년형 선고 받음 |
출생지 | 무주군 -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정의]
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활동 사항]
이용이(李用伊)[1868~?]는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에서 출생하였다. 문태서(文泰西) 의병 부대에서 활동하며, 화약을 제조하여 공급하였다. 문태서는 대한 제국 군대의 하사 출신으로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반대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최익현(崔益鉉)을 만나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지리산에서 창의(倡義)하였다. 1907년 9월 이용이는 전라북도 장수에서 박춘실(朴春實)을 선봉장으로 삼고 장수읍을 함락하였다. 1907년 호남 창의 대장에 추대되어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하였다가 무주 덕유산(德裕山)을 근거로 영남, 호남, 호서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순종 2) 2월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였고, 4월에는 장수읍을 공격하였다. 1909년 1월에는 지례, 4월에는 용담, 5월에는 남원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용이는 무주에서 문태서의 부하 김상진(金尙鎭)의 의뢰를 받고 1908년 3월 말일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화약 45㎏[75근]을 제조하여 공급하고 무기를 수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20여 명의 부하을 거느리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 전라북도 용담군 이동면 보촌의 목수 명경안(明敬安)[58세]과 함께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광주 지방 재판소 전주 지부에서 폭동 종범(暴動從犯)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나이는 42세였다.
[상훈과 추모]
2006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