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6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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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家 |
영어공식명칭 | Independence Fighter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정의]
일제 강점기 무주 출신이거나 무주 지역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항일 운동가.
[개설]
일제의 국권 침탈이 이어질 때에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국권을 잃게 된 후에는 독립을 위한 우리 민족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무주 지역에선 전일봉(全日奉)이 1919년 4월 1일 무주 장날 만세 운동을 일으켰고,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주도하거나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무주 지역의 의병]
무주군은 영호남을 양쪽에 두고 위치한 덕유산(德裕山)이 있어서 의병 활동을 하기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무주에서는 일명 을사·정미 의병이라고도 하는 제2차 의병 기간에 의병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먼저 무주 출신 강무경(姜武景)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될 무렵 일본군이 무주에 나타나서 하는 일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삼남 지역을 돌아다니며 동지를 찾았다. 마침 의병을 모으던 심남일(沈南一)을 만나 의병대를 조직하였고, 함평과 남평, 보성 등 주로 전라남도에서 활약하였다. 신명선(申明善)은 한국군 시위대 출신으로 군대가 해산된 이후 고향인 무주로 돌아와서 의진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종성(李鍾誠)은 문태서(文泰端) 의병장의 아장(亞將)으로 영남, 호남, 호서 등지에서 활약하여 일본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문태서가 체포된 후에는 이병렬(李秉烈) 의진의 선봉장으로 1910년 4월 무주군 무풍 흑석 산곡(茂豊黑石山谷)에서 소수의 의병을 지휘하여 매복하고 있던 중 심야에 일본군이 내습하여 교전하다 전사하였다. 그 외에 무주군 출신 의병으로는 김동학(金東鶴), 김용보(金龍甫), 김원일(金元日), 이병렬(李秉烈), 이용이(李用伊), 장광옥(張光玉), 최충길(崔忠吉), 한진수(韓鎭壽) 등이 있다.
경상도 안의 출신 문태서(文泰瑞)는 무주에서 거병하여 호남 의병단을 조직하고 덕유산을 근거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장수 출신 박춘실은 무주, 장수, 진안 등지에 격문을 보내 모병하고, 일본군과 60여 차례 교전 또는 습격 등을 감행하여 수백의 적병을 살해하였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으나 1909년(순종 3)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 받았다.
[무주 지역 독립운동가]
무주 지역의 3·1 운동은 무주군 적상면 사람 전일봉이 먼저 주도하였다. 전일봉은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무주에서도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전주 신흥 학교에 다니다가 전주 만세 운동으로 잠시 귀향했던 동생 전기봉과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사 계획을 논의하는 한편, 매일 밤마다 모여 이불로 불빛을 가리고 태극기를 그렸다. 4월 1일은 무주읍 장날이었다. 전일봉은 오후 2시, 장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하였다. 연설이 절정에 이르자 송희중과 김재순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고 무주 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장에 모인 군중들이 이에 호응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제압으로 해산되고 전일봉은 체포되었다.
김판두(金判斗)는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되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이 되었는데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무주 지역의 3·1 운동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신흥 종교 단체인 증산교(甑山敎), 공도회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이다. 무주군 적상면 출신의 신종범은 증산 교인들에게 “교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살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다. 또 무주군 무주읍 출신의 이두현은 무주와 금산 등지에서 “공도회는 우리 민족 정신과 사상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이니 공도회에 가입하여 민족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두현 역시 체포되어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겪어야 했다.
김환태(金煥泰)는 전주 고등 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4년 교내에서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자 중간 고사를 거부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일본인 교사 추방 등을 목적한 동맹 휴학을 주동하였다. 최낙철(崔洛哲)은 대구 사범 학교에 재학 중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고, 졸업 후 교사가 되어서는 학생과 학부형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문화를 통한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