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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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敵- 四溟堂- 表忠碑閣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석태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으며 국가적 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고 전해지는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
[개설]
경상남도 밀양에는 사명대사 생가지와 밀양 표충비가 있어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에 의승병을 이끌고 활약하였으며, 1593년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일본과의 외교 및 부국강병책으로 나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사명대사 유정]
사명대사 유정의 본관은 풍천, 속명은 임응규(任應奎)이다.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며, 법명은 유정(惟政)이다. 1544년(중종 30)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임수성(任守成)이다.
7세 전후에 『사략』을 배우고 1556년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의 황악산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선문에 들어간 지 3년 뒤 승과(僧科)에 합격하였다. 박순(朴淳), 임제(林悌) 등의 유생들과 사귀었고, 노수신(盧守愼)에게서 『노자』, 『장자』, 『열자』와 시를 배웠다. 그 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다. 1575년(선조 8)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도를 닦았고,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태백산·청량산 등에서 선을 닦았다.
1586년(선조 19)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사건에 연류되었다는 모함을 받았고, 강릉의 유생들이 무죄를 항소하여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점사(楡岾寺)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順安)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순안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1593년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자, 선조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뒤 네 차례에 걸쳐 사신으로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적진에서 강화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제1차 회담[1594년 4월 13~16일]·제2차 회담[1594년 7월 12~16일]·제3차 회담[1594년 12월 23일]·제4차 회담[1597년 3월 18일]에서 강화 5조약으로 제시된 ‘천자와 결혼할 것, 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전과 같이 교린할 것, 왕자 1명을 일본에 영주하게 할 것, 조선의 대신·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논리적인 담판으로 물리쳤다. 제2차 회담 후 회담 전말, 적의 동정과 대처 방안을 내용으로 하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선조에게 올렸다. 또한, 1595년에 올린 을미상소의 주요 내용은, 탐관오리들을 소탕할 것, 국세 회복을 위해 방어책을 세울 것, 인물 본위로 등용할 것, 군정(軍政)과 중농 정책을 확립할 것, 산성을 수축하고 군량·마초·방어무기를 준비할 것, 승려도 국가 수비의 일익을 담당하게 할 것 등이다.
유정이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또는 미숭산성(美崇山城)]·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또한, 1594년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사찰의 전답마다 봄보리를 심도록 하고, 산성 주변을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비장하였다. 선조는 유정의 공로를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다.
1604년 휴정의 부음을 받고 가던 중, 선조의 명으로 일본에 가서 성공적인 외교 성과를 거두었으며,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 귀국하였다. 1605년 10월 묘향산으로 들어가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광해군 2) 8월 26일 설법을 마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 등이 있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1997년 사명당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학술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사명대사 생가지]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 있는 밀양 사명대사 생가지(密陽四溟大師生家址)는 1992년 10월 21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사명대사가 1544년(중종 30)에 진사 임수성(林守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3세 때 직지사 신묵(信默)에게 가서 승려가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현재 사당인 숙청사와 사명대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인 육영당, 사명대사가 거처하던 사랑채인 사명당 등이 남아 있다.
사명대사는 밀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많은 일화가 전해 오고 있다. 또한 이따금 고향으로 돌아올 때 쉬었다는 바위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 사명대사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다. 마을 뒷산 서쪽 기슭에 사명대사의 할머니와 부모의 묘소가 있다.
[표충비]
표충비(表忠碑)는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으로, 일명 사명대사비라고도 불린다. 표충비는 1742년 10월 사명대사의 5대손인 남붕선사가 경상북도 경산에서 돌을 가져다가 현재의 자리[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세운 것이다. 무안지서[파출소]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좌대를 포함한 총 높이는 380㎝, 비신의 높이 275㎝, 너비 98㎝, 두께 56㎝의 큰 비석이다. 표충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몸통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을 얹은 구조이며, 비의 몸통은 검은색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뒷면에는 서산대사 휴정의 행장을, 측면에는 밀양 표충사의 내력, 그리고 기허대사의 비명이 있다. 비문은 영중추부사 이의현이 짓고,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이 글씨를 썼으며, 판중추부사 유척기가 전서하였다.
비석의 정면에는 ‘유명 조선국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영당비명병서(有明朝鮮國密陽表忠祠松雲大師靈堂碑銘幷序)’를 새기고, 뒷면과 옆면에는 ‘서산대사 비명’과 ‘표충사 사적기’를 음각하였다. 비문에는 표충사의 내력, 서산대사의 행적, 사명대사의 행적 등을 4면에 고루 새겨 놓아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스승의 뒤를 이어 승병 활동을 한 사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 내용, 선조의 어명으로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데리고 온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표충비는 비석 3면에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행적을 기록하여 일명 ‘삼비(三碑)’라고도 불린다. 사명대사 임유정이 무안면 고라리에서 아버지 임수성과 어머니 달성서씨 사이에 태어나고 67세로 일생을 마감하기까지 54년에 걸친 승려 생활을 한 행적과 함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구국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홍제사는 1742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 태허당 남붕선사가 현재의 터에 표충비와 사당을 세우면서 사당을 지키는 수호 사찰 역할을 하였으나 사당이 영정사[지금의 사찰 표충사]로 옮겨지면서 비각의 보호와 관리를 위하여 작은 원당과 삼비문(三碑門)을 세운 것에서 시작하였다.
표충비는 국가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 불안한 징조가 보일 때에 비석 전면에 자연적으로 땀방울이 맺혀서 구슬땀처럼 흘러내린다 하여 ‘땀 흘리는 표충비’라고 불리기도 한다. 때로는 비석의 4면에서 이슬처럼 몇 시간씩 계속 흐르다가 그치는데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조대에서는 물기가 전혀 비치지 않는다고 전한다. 밀양 사람들은 나라와 겨레를 존중하고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고 하여 신성시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이 신기한 현상을 두고 기후 변화에 따른 외기현상이라고도 하고, 비석 자체의 결로 현상에 연유한 것이라는 과학적인 해명을 하고 있다. 표충비는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정출헌이 쓴 「사명당에 대한 사대부들의 기억과 그 시대적 맥락」에 따르면 “사명당은 사실과 허구가 복잡하게 뒤얽혀 만들어 낸 이미지, 또는 기억의 서사로 재구성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즉, “임진왜란 참전을 전후로 한 사명당에 대한 기억은 청고(淸高)한 시승(詩僧)에서 강개(慷慨)한 승장(僧將)으로 변화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사명당의 사후에 사명당에 대한 기억은 다시 한 번 재구성된다. “사명당이 입적한 합천 해인사의 승려들은 그의 전란 참여 행위를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한 불교적 자비(慈悲)로 기억하고자 했지만, 사명당이 태어난 밀양 지역 사족들은 국난 극복을 위한 유가적 충의(忠義)로 기억하고자 했다. 둘의 대립은 국가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리하여 홍제암(弘濟庵)에 모셔졌던 ‘홍제존자(弘濟尊者)’라는 이미지는 희미해지고, 표충사(表忠祠)에 모셔진 ‘사명성사(四溟聖師)’라는 이미지가 지금 우리에게 뚜렷이 남아 있게 되었다.” 이처럼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의 눈부신 활동으로 임진왜란과 관련한 밀양인의 표상으로 밀양, 그리고 밀양 사람들에게 각인이 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