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678
한자 洪震
이칭/별칭 면희(冕熹),진(鎭),만호(晩湖),만오(晩悟)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손민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출생 시기/일시 1877년 8월 27일연표보기 - 홍진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98년 - 홍진 법관 양성소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홍진 애국지사 변호
활동 시기/일시 1921년 4월 - 홍진 상하이 대한 교민단 단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홍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7월 - 홍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7월연표보기 - 홍진 한국 독립당 창당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홍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
활동 시기/일시 1942년 - 홍진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장
몰년 시기/일시 1946년 9월 9일연표보기 - 홍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 - 홍진 건국 훈장 국민장 추서
묘소 홍진 최초 묘소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
묘소 홍진 묘소 이전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 안장되었던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초명은 면희(冕熹), 호는 만호(晩湖)·만오(晩悟)이다. 아버지 홍재식(洪在植)과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남숙희(南叔熙)의 딸 남상복(南相福)을 아내로 맞이하여 슬하에 아들 홍기택(洪起澤)을 두었다.

[활동 사항]

홍진(洪震)[1877~1946]은 가난한 명문 선비가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1898년 법관 양성소를 졸업하고 한성 평리원(平理院)[대한 제국 때 재판을 맡아보던 중앙 관청으로 최고 법원에 해당] 주사로 활동하다가 평리원 판사로 승진하였고, 1905년 충청북도 충주 재판소 검사로 전임되었다. 홍진은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이하자 검사직을 사임하고 변호사가 되어 서울에서 독립운동가를 위한 변호 활동을 펼쳤다. 홍진은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4월 인천광역시 중구 만국 공원[지금의 자유 공원]에서 13도의 대표들과 국민 대회를 열어 한성 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조직하고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그 후 홍진은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 의정원 의원·법제위원장을 지내며 제도 정비에 힘썼다. 홍진은 1921년 4월 상하이 대한 교민단(大韓僑民團) 단장, 5월 임시 의정원 의장, 8월 대 태평양 회의 외교 후원회 간사장 등을 역임했다. 1922년 7월 홍진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 등과 함께 시사 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홍진은 1923년 임시정부 법무 총장, 1926년 7월 국무령에 임명되어 김응섭(金應燮), 이유필(李裕弼) 등과 국무위원회(國務委員會)를 조직하였고, 9월 외무 총장을 겸임하며 다음과 같이 임시정부의 시행 방침 3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첫째, 비타협적 자주 독립운동을 진작한다. 둘째, 전 민족 대당체(全民族大黨體)를 건립한다. 셋째, 각 피압박 민족과 대 연맹을 체결하고 기타 우의(友誼)의 국교를 증진한다. 그 후 독립운동 단체 간 분규가 계속되자 홍진은 1927년 유일당을 조직하였다.

홍진은 1927년 말 임시정부 대표로 동북 지방에 파견되어 한족 자치 연합회를 형성하고, 1930년 7월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여 중앙 위원장 및 군민 회의(軍民會議) 부위원장이 되었다. 홍진은 1931년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한국 독립당의 군사를 한국 독립군으로 개편하고 중국과 연합하여 항일 작전을 펼쳤다. 또한 1934년 만주 한국 독립당과 난징 한국 혁명당을 통합하여 신한 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고 이후 한국 독립당으로 재조직했다. 홍진은 1935년 7월 한국 독립당·조선 혁명당·한국 국민당·대한 독립단 동지회·국민회·부인 애국단·단합회·애국단 등을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 광복 진선(韓國光復陣線)을 조직했고, 선전 위원으로 선전 공작을 전개했다. 홍진은 1940년 한국 광복 진선의 9개 단체가 통합되어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자 중앙 감찰 위원장이 되어 한국광복군 창설을 도왔다.

홍진은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 1942년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하며 8·15 해방까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홍진은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으나 1946년 9월 9일 서거하였다. 명동 성당에서 장례 위원장 김구 집례로 홍진의 장례 미사가 행해졌고, 홍진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 안장되었다.

[묘소]

홍진은 1946년 9월 9일 서거 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12월 15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로, 1994년 10월 6일 국립묘지 임시정부 요인 묘소로 이장되었다. 한편 인천광역시립 박물관 옥외 전시장에 홍진의 묘비가 전시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홍진은 1962년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2010년 국회 도서관에 ‘홍진 임시 의정원 의장 기념 전시실’이 조성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