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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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역(梁嶧) : 호는 운곡(雲谷)이요, 본관이 남원(南原)이니 대사간(大司諫) 양사귀(梁思貴)의 셋째 아들이다. 기유년(세종 11년, 1429)에 사마시에 합격해 연일진병마첨절제사(延日鎭兵馬僉節制使)를 지냈다.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공손하고 검소한데다가 뜻이 멀고 행실이 높아서 안과 밖에서 추중(推重)되었다. 단성(丹城)으로부터 진주 운곡(雲谷)에 옮겨와서 살았다. ○ 하공효(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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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원(閔愿) : 자는 흥중(興仲)이요, 호는 석계(石溪)이며 본관이 여흥(驪興)이니 판서(判書) 민심언(閔審言)의 후손이다. 문과에 올라 직장(直長)이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면서 행실은 방정했으며 목표하는 것은 높으면서 뜻은 넓었다. 충주(忠州) 음성(陰城)으로부터 옮겨와 진주의 옥봉(玉峰)에 살았다. ○ 최원민(崔元敏) : 호는 죽계(竹溪)요, 본관이 삭녕(朔寧)이니 사간(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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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최씨(全州崔氏) : 열부(烈婦). 최운개(崔云凱)의 딸이요, 승사랑(承仕郞) 진양(晉陽) 정승업(鄭承業)의 아내다. 임진년에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항상 칼을 차고 스스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만일 불행한 일을 만나게 되면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써 죽음을 결단할 것”이라고 했다. 해를 넘겨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과연 왜적이 이웃 마을을 핍박하여 거의 모두 죽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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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에 소장되어 있는 효행 관련 고문서. 「권병천등상서」는 단성·거창·진주 등 경상우도 유생들이 하진태의 효자 정려를 위해 암행어사에게 올린 진정서이다. 매우 긴 글로 하진태의 효행상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진정서를 접수한 어사는 사림의 공의를 인정하고 효행을 적은 원장(原狀)을 등서(謄書)하여 들일 것을 지시하는 등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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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목 사천군 장암리에 설치된 조창(漕倉). 경상도는 1403년(태종 3) 조운 영역에서 제외된 뒤로 경강선(京江船)의 주요 활동 지역이었다. 그러나 항로가 험하여 해난사고가 많았고, 사선(私船) 선가(船價)의 지급도 막대하였다. 또 왕권을 확립하려고 여러 제도 개혁을 추구하던 영조는 세곡 운송제의 문제점을 조운 기능의 강화로 해결하려고 관선조운제(官船漕運制)를 복구하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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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 왕건(王建)의 건국 이래 1392년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에 멸망할 때까지 34대 474년 간 존속한 왕조. 진주는 통일신라 말부터 후백제를 거치면서 강주(康州)로 불리다가 940년(태조 23)에 진주로 개칭되었고, 983년(성종 2)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진주목이 되었다. 이에 앞서 광종 때에는 진주향교가 창설되어 진주의 학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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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의 공북문 성벽에 새겨진 글귀. 공북문 성벽 석각은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의 북쪽문인 공북문(拱北門) 서쪽 성기에 새겨져 있는 글씨로 가로 80㎝, 세로 25㎝ 크기의 석재에 ‘康熙十九年山陰馬兵中哨泗川昆陽河東丹城咸陽六官一哨’라고 씌어져 있다. 이는 진주성의 수축을 담당하였던 구역의 표시를 나타낸다. 조선시대의 축성 기록을 살펴보면,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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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외율리·덕곡리·계원리·신기리에 걸쳐 있는 산. 진주시의 서북쪽에 있으며, 산청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진주 시내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광제산의 높이 420m의 산으로, 정상에는 산성터와 절터가 남아 있다. 또한 조선시대 세종 때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광제산봉수대의 화구(火口)와 석축 일부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경상남도 기념물 제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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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진주에서 조직된 영남 사림들의 친목단체. 섭리에 순응하고 이상적인 도학(道學)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사림파의 친목단체로 조직되었다. 지배층의 솔선수범과 근검절약을 신조로 삼았다. 1489년(성종 20), 진주목사 경임, 김해도호부사 이손(李蓀)[1439~1520], 창원도호부사 이영분(李永賁), 전 진주목 교수 김일손(金馹孫)[1464~1498], 조위(曺偉) 등을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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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안동 출신이다. 아버지는 김진(金璡)이고, 동생은 김복일(金復一)이다. 1556년(명종 11)에 아우 김복일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1564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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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상주. 자는 성인(成仁). 고려 때 직제학을 지낸 김후(金後)의 후손으로 군수 김녹돈(金祿敦)의 손자이다. 아들 김봉승(金鳳承)은 정유재란 때 진주 발재[鉢峴]에서 전사하였다. 출생년은 미상으로 산청의 단성에서 살았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후 1583년(선조 16) 북평사 이제신(李濟臣)과 함께 군관으로 출정하여 북쪽 야인을 격퇴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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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남쪽의 통일신라[676~935]와 북쪽의 발해[698~926]가 양립하던 시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676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이후 935년까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영토를 다스리게 된다. 한편, 통일신라 북방에는 698년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중국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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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하여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운동. 동학운동 당시 동학군과 일본군과의 대규모 격전이 있었던 곳은 진주 고승당산(高僧堂山)이었다. 고승당산은 해발 185m로, 일명 고시랑산 또는 고성산(高城山)이라 한다. 고승당산은 지표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동남쪽 들판은 덕천강을 경계로 하여 진주시 수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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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 지역에 있는 삼국시대 유물산포지. 진주시 평거동에서 명석면으로 가는 도로변에 있는 우수골 북쪽 야산 정상부와 사면에 위치하고 동쪽 맞은편 야산에도 분포하고 있다. 2004년 진주시·경상대학교박물관에서 발간한 『문화유적분포지도 -진주시-』에 5개 지점에 분포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1곳인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 359-29번지는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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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 정상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봉(熢: 횃불), 낮에는 수(燧: 연기)로써 급보를 전하던 통신방법. 봉수는 전근대시대에 변경의 급보를 전달하는 동시에 해당 지역의 영진(營鎭)에도 알려 적의 침략에 대비했던 통신제도로서 민간통신으로는 활용되지 못했고 단지 군사통신으로만 사용되었다. 봉수제의 유래는 오래된 듯하며, 중국에서는 25~27년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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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 부처가 되는 것을 궁극적 이상으로 삼는 종교. (1) 삼국시대의 불교 : 삼국 중 불교를 제일 먼저 수용한 나라는 고구려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72년(소수림왕 2) 6월에 전진(前秦) 왕 부견(苻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있다. 이때 도입한 고구려불교의 특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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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있었던 두 차례의 큰 전투 조선시대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는 두 차례 있었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10월(이하 음력)의 전투를 제1차진주성전투라 하고, 이듬해 계사년(1593년) 6월의 전투를 제2차진주성전투라 부른다. 제1차진주성전투는 곧 진주대첩으로서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반면, 제2차진주성전투는 성이 함락됨과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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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대대적 개편 때 진주는 목으로서 정3품의 목사가 배치되고, 그 아래 판관(종5품)과 교수(종6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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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絶對)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여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행위.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한계를 갖는 유한한 존재라는 자각에서 기인한다.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감이 매우 크기 때문에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고 믿는 절대자에게 의탁하여 현세에서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추구하고, 사후세계에서는 구원을 희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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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판문동에 있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댐과 남강댐에 의해 생긴 인공호수. 진주를 흐르는 남강의 근원은 둘이다. 하나는 지리산 북쪽에서 나오는데 경호강이라 부르며, 다른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데 덕천강으로 부른다. 이 두 강이 진주 시내 서쪽 광탄(光灘)[너우니]에서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 제방을 쌓고 사천만으로 방수로를 뚫어 남강 하류의 홍수를 방지하자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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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덕곡리 산 1번지 정상부에 있는 봉수대. 광제산봉수는 조선시대 5거(距) 봉수노선 중 제2거 노선의 간봉으로 남쪽의 망진산봉수(望晉山熢燧)의 신호를 받아서 북쪽에 위치한 단성(丹城) 입암산봉수(笠巖山熢燧)로 신호를 전달하였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및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의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에 ‘광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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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진주 행정구역 명칭. 진주는 고려 초기 청주(菁州)라 하였다가 다시 강주(康州)로 환원하였고, 983년(성종 2) 2월 주제(州制)를 목(牧)으로 개혁하면서 진주는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성종 14년(995) 9월 처음으로 전국에 10도를 두었는데, 이때 진주에는 산남도(山南道)가 설치되어 10주 37현을 통할했다. 현종 9년(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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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부터 정부수립 후인 1949년까지의 진주 행정구역 명칭.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그동안 시행해오던 8도제(道制)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府)로 구분하고, 그 아래에 336군(郡)을 설치하는 획기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부에는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군(郡)에는 군수(郡守)를 두었는데, 이때 진주에는 지금의 도격인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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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포진지. 진주성 포루는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로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내성의 포루는 3곳이니 삼가, 의령, 곤양 등 3읍의 소속”이고, “외성의 포루는 9곳이니 진주, 단성, 초계, 거창, 사천, 함양, 남해, 합천 등 8읍 소속”이라고 하였다. 1607년(선조 40)에 김태허(金太虛)에 의해 진주성 내외성에 포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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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시. 진주시는 동쪽으로 창원시와 함안군, 서쪽으로 하동군, 남쪽으로 사천시와 고성군, 북쪽으로 산청군·의령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부 경상남도의 거점 도시로, 2005년 10월 경상남도의 혁신 도시로 선정되었다. 경위도상으로 동경 127°53′ 52″~128°22′ 21″인 수곡면 원계리 동월마을에서 이반성면 발산리 내동마을까지이며, 북위 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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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17세기 초에 이루어진 진주의 사찬(私撰) 지리지. 지리지는 수록된 공간 범위에 따라 전국지인 여지(輿誌)와 지방지인 읍지(邑誌)로 나눌 수 있다. 또 지리지를 편찬한 주체에 따라 국가기관에서 만든 관찬(官撰) 지리지와 개인이 편찬한 사찬 지리지로 나누어진다. 전국 단위의 지리지로는 『동국여지승람』이 대표적이다. 조선 중기 이후 활발하게 편찬된 읍지는 전국 지리지인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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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부터 가야 등 고대시대까지의 무덤.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의 죽음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인 존재로서 죽는 것이므로, 장송의례(葬送儀禮)는 개인적·가족적 차원을 넘어서 한 집단 전체 차원의 사회적인 제도가 된다. 따라서 죽음과 이에 부수된 의례의 결과로 생겨난 무덤에는 당연히 사회적 제도인 의례행위(儀禮行爲)가 반영되어 있다. 특히 고인돌처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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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 솔기마을에서 전승되는 천고개에 관한 지명 유래담 설화. 천고개 설화는 특정 지역에서 옛날에 일어났으리라고 믿어지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전설로 지역적 전설에 해당한다. 지역적 전설은 대부분 지방의 지리적 특징이나 명칭의 유래, 습관의 기원 등을 이야기한다. 또 전승 집단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환경이 어떻게 하여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설명할 목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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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의 옛 지명 진주는 가야 지역으로 거열성(居列城)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문무왕 3년(663) 2월에 거열성을 공취하여 거열주(居列州)라고 하였다. 신문왕 5년(685) 봄에 처음으로 9주를 정비하면서 거열주를 높여 청주(菁州)라 하고 대아찬 복세(福世)로 하여금 청주총관을 삼았다. 「삼국사기지리지」와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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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에 있는 민영 방송국. 생동감 있고 깨어있는 방송을 통해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방송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1960년대 초부터 당시 로타리 클럽 회장이던 정영수와 상공회의소 회장 최병주, 지역인사인 문해술, 부산 MBC 사장인 안성수 등이 주축이 되어 민간상업방송을 추진하여, 1967년 11월 10일 호출부호 HLAK, 주파수 1,320KHZ, 출력 10Kw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