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07
한자 朝鮮時代
영어공식명칭 The Joseon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정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념용어(일반)

[정의]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1392~1910) 동안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역사.

[행정구역]

경상남도 함양 지역은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강주에 속해 있었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후 1395년(태조 4)에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경상도 진주진관(晉州鎭管) 소속이었다. 조선 후기 영조 때인 1729년에는 함양부(咸陽府)로 승격되었다. 안의현(安義縣)은 조선 건국 후 군현제도가 정비되는 태종 때부터 현감이 파견된 독립현으로 존재하다가 조선 후기 1728년 무신의 난 때 정희량의 반란을 토벌하고 1729년 고을을 혁파하여 함양군과 거창군에 분속시켰으며, 7년 뒤 1736년에 다시 복현되었으므로 함양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고종 재위기인 1895년 6월 23일(음력 윤5월 1일)에 전국을 23부의 행정구역으로 조정하는 지방제도를 개정하였다. 종래의 부(府)·목(牧)·군(郡)·현(縣)의 명칭과 부윤(府尹)·부사(府使)·목사(牧使)·군수·현령·현감의 관명을 폐지하였다. 읍(邑)의 명칭을 군(郡)이라고 하며, 읍의 장관을 군수라고 하였다. 당시 함양군은 진주부에 소속되었다.

[정치]

함양 지역은 조선 후기 북인정권의 몰락과 서인 정치세력의 등장이라는 사회 변동 속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정인홍의 처형사건과 정희량의 반란사건들은 함양의 위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학문과 충절의 지역이 중앙정계로부터 외면되는 대우를 받으면서 관직에서도 배제되었다.

중앙정계의 문란과 병행하여 관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을 수탈하는 행위가 심하였다. 18~19세기의 환곡문제는 큰 부담이 되었고 삼정의 폐단과 과중한 세금 및 탐관오리들의 수탈은 백성들이 살아가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고 있었다. 영조 때 발생한 이인좌의 난에서 공모자인 정희량(鄭希亮)이 함양군 안음 출신이었고, 안음현(安陰縣)은 역적을 따른 고을로 판단되어 혁파(革罷)하여 거창과 함양부(咸陽府)에 소속시키면서 고을 자체를 없애버리는 처벌을 당하였다. 이러한 결정과 시행의 과정에서 지역적 차별과 관리들의 탐학 및 백성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정조 때 경상도관찰사 이조원(李祖源)이 함양의 환곡에 대한 폐단을 바로잡을 것을 보고하고, 국왕이 지시한 하교의 내용에는 백성들이 병들고 있는 폐단을 말할 때면 먼저 영남(嶺南)을 들고 영남에서도 ‘함양’이 첫손에 꼽힌다고 하였다. 진휼과 구제조치를 취하기는 하지만 농민들의 저항의 움직임은 19세기에 함양에서도 농민항쟁이라는 형태로 농민들의 누적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사회와 군사]

함양의 군명은 속함(速含)·함성(含城)·천령(天嶺)·허주(許州)·함양(含陽) 등이었다. 1759년(영조 35)의 호적대장(戶籍臺帳)에 등재된 원호(元戶)는 4,763호이며 인구는 2만 1,640명이었다. 이 중 남자는 8,740명, 여자는 1만 2,900명이었다. 옛 읍은 관아의 동쪽 2리 지점에 있었다. 고려 말 우왕 때인 1380년 왜구의 침입으로 관아가 불에 타 버렸고, 문필봉(文筆峯) 아래로 관아를 옮겨 흙을 쌓아 성을 만들었다. 읍성(邑城)은 둘레가 735척(尺), 나각(羅閣)이 243칸이었다. 성문은 3개였는데, 동쪽은 제운문(齊雲門), 서쪽은 청상문(淸商門), 남쪽은 망악문(望嶽門)이었다. 조선 후기인 1729년 영조 때 부사(府使) 김광(金洸)이 다시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예전과 같았고 높이는 11척이었다. 처음에는 토성이었으나 후에는 석성이었던 함양읍성과 함께 함양 지역의 산성으로는 박회성·추성·육십령 고성·방지성·팔령산성·황석산성·사근산성·마안산성 등이 있다. 돌을 이용해 축조한 석성으로 그 흔적들이 현재도 남아 있으며, 크고 작은 전란이 지속되었던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라는 함양의 지리적 특성으로 다수의 산성들이 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황석산성은 정유재란 때 허물어진 곳을 수축한 것으로써 치열한 격전을 벌인 전적지이다.

함양의 조선시대 관청인 공해(公廨)로는 객사·동헌·청심당(淸心堂)·우락당(憂樂堂)·향사당(鄕射堂)·군관청(軍官廳)·정융당(整戎堂)·부사(府司)·인리청(人吏廳) 등이었다. 창고로는 군기고(軍器庫)·대동고(大同庫)·사창(司倉) 등이 있었으며, 저수지로는 두산제(豆山堤)가 관아의 북쪽 5리에 있었다. 둘레는 242척이고, 물의 깊이는 5척이다.

교통과 숙박시설로는 제한역(蹄閑驛)이 관아의 서쪽 15리에 있었고, 관아의 동쪽 16리에는 사근역(沙斤驛)이 있었다. 관아의 남쪽 2리에는 사신을 영접하는 곳으로 누각이 달린 광혜원(廣惠院)이 있었고, 사근역의 동쪽에는 사근원이 있었다. 도현(桃峴) 아래에는 도현원이 있었고, 관아의 서쪽 20리에는 덕신원(德信院)이 있었다. 조선 후기 18세기경에는 사근원도현원·덕신원은 없어졌다. 전국의 교통망을 정비한 1438년(세종 20) 4월에는 함양에 신설한 역을 제한역(蹄閑驛)이라 하고, 안음에 신설한 역을 임수역(臨水驛)이라 하였다.

[함양 풍속과 교육]

함양의 풍속은 신중하고 성실함을 숭상하는 지역이었다. 여말선초의 새로운 질서의 재편과정에서 고려의 유신들로서 함양 지역으로 내려와 은거한 자들이 많았다. 안의 금원산 아래에 은거한 고려 말 대사헌을 지낸 유환(劉懽), 안의 황곡에 은거한 박덕상(朴德祥), 안의 금천에 와서 은거한 김현(金峴), 함양 백전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친 박흥택, 귀향하여 함양향교가 창건되자 향교의 명륜당 기문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조승숙 등 여러 인물들이 당시 함양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고려 유신들의 활동은 함양이 학문적으로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승숙 이후 유호인·정여창·표연말·박맹지·정희보·노진·이후백·강익·양희·박여량·박명부 등 학문과 문장, 충효절의 문학과 예술 등에서 회자되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함양군수로 재임한 영남사림파의 영수 김종직 등의 영향도 있다. 함양의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 노숙동(盧叔仝)이 있다. 함양의 노씨 입향조인 노숙동은 1403년(태종 3)에 태어나 1427년(세종 9)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과 단종을 거쳐 세조 때까지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노숙동은 개평마을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는데,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후 박사(博士)·교리(校理)·지제교(知製敎)를 지내면서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6년(세종 18)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쳐 대사헌, 형조참판과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때 함양의 도곡(道谷)서원에 제향되었다. 또한 문종 때 경상도관찰사와 한성판윤 등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푼 이백량도 관직을 그만두고 함양 지곡에 터를 잡아 정착하였다. 국왕이 노숙동의 전답에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고 하며, 지금까지 함양군 지곡면 계곡(鷄谷) 사람들이 마을을 공세동(貢稅洞)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노숙동을 존경하였으며 마을 입구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를 공세암(貢稅岩)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정여창의 증손으로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출생한 정수민(鄭秀民)이 후진교육에 노력하였다. 12년 동안 남계서원 원장을 맡아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교육발전과 서원의 위상을 높였다. 특히 정수민은 함양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구해 1656년 함양군지인 『천령지』를 편찬하였다. 『천령지』『함양군지』의 모체가 되고 있다. 충효열이 강조되고 표창된 조선시대에 그 실천 사례를 잘 보여주는 함양의 정려비로는 효자 정려비·충신 정려비·열녀 정려비 등의 유형이 있고, 묘비는 수없이 산재해 있다.

[산업]

함양 지역의 주업은 농업이며 꿀의 명산지이다. 특산물로는 오미자·대나무·벌꿀·석이버섯·감·은어·석류·잣 등이었다. 도자기나 옹기 등은 조선시대 생활필수품이기 때문에 함양에서도 여러 장소에서 생산되었으며, 서상지방에서 유기(鍮器) 그릇도 생산되었다. 함양군 마천면에서는 목공예가 발달하여 목기 생산이 유명한 곳이기도 하며, 돗자리나 죽세품(竹細品)도 생산되었다. 또한 목기는 제기로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마천에서는 목기가 많이 생산되었다.

[자연재해]

조선시대에도 기상이변, 지진 등 천재지변, 자연재해가 많이 발생하였다. 함양의 지진 발생은 세종 때의 경우만 보더라도, 1421년(세종 3) 11월 함양군 안음을 비롯한 9개 고을에 천둥이 치고 지진이 발생하였다. 1425년(세종 7) 2월 10개 고을에서 지진이 일어났고, 1429년(세종 11) 1월 6개 고을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1430년(세종 12) 1월 12개 고을에서 지진이 일어났으며, 2월에는 안의 거창 등지에서 지진이 발생하였고, 4월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전역에서 지진이 일어났으며, 9월에는 함양을 비롯한 8개 고을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1431년(세종 13) 1월에도 함양·개녕·지례 등지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1439년(세종 21) 9월에는 함양군과 안음현에 지진이 일어나는 등 지진이 자주 발생하였다. 지진과 강풍 폭우 등의 자연재해는 조선 후기에서도 시기에 따라 반복하여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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