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66 |
---|---|
한자 | 許慥 |
영어공식명칭 | Heo Jo |
이칭/별칭 | 사가(思暇),응천(凝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환 |
[정의]
조선 전기 하양이 관향인 문신.
[개설]
허조(許慥)[?~1456]는 문과 급제 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지냈다. 1456년(세조 1)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와 더불어 단종복위를 계획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자결하였다.
[가계]
허조의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사가(思暇), 호는 응천(凝川)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허귀룡(許貴龍)이며, 할아버지는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이다. 아버지는 사온서령(司醞署令)을 지낸 허눌(許訥), 어머니는 좌랑(佐郞)을 지낸 민보문(閔普文)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큰아버지 정간공(貞簡公) 허후(許詡)에게 출계하였다. 부인은 좌윤(佐尹)을 지낸 이후근(李厚根)의 딸 증(贈) 숙부인(淑夫人)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활동 사항]
허조는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올랐다. 1451년(문종 2)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56년(세조 1) 박팽년·유성원(柳誠源)·성삼문·하위지(河緯地)·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 그리고 매부였던 이개(李塏)와 더불어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축출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고변으로 계획이 발각되자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이 사건으로 어머니·부인·누이·딸이 공신의 노비가 되었으며, 두 아들 허연령(許延齡)과 허구령(許九齡)은 죽임을 당하였다. 아울러 통진(通津)과 하양에 있던 전답은 적몰되었다.
[학문과 저술]
허조의 유고로는 1863년(철종 14) 하양 지역에 세거하는 후손들이 허조(許稠)·허후(許詡)·허조(許慥) 3대(代)의 유사(遺事)를 엮어 간행한 『금호세고(琴湖世稿)』 4권 2책이 있다.
[상훈과 추모]
허조는 1790년(정조 14) 복관(復官)되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증직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의 왕릉인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에 추향(追享)되었으며, 1792년(정조 16) 허후와 함께 충신으로 정려(旌閭)되었다. 1806년(순조 6) 화암서원(花巖書院)[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괴강로 313]에 추향되었고, 1814년(순조 14)에는 관향인 하양에 허후·허조부자정충각(許詡許慥父子旌忠閣)[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대경로 527]이 세워졌다. 1923년 금락리금호서원(琴樂里琴湖書院)[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아낙고개길4길 25]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