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산과 여의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499
한자 胎峯山-如意珠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5년 - 「태봉산과 여의주」 『광주시사』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0년 - 「태봉산과 여의주」 『광주의 전설』에 수록
관련 지명 태봉산 -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지도보기
성격 설화|지명전설|풍수담
모티프 유형 지명 유래|풍수 설화|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태봉산에 관한 이야기.

[개설]

옛날 사람들은 전라도 광주의 지형을 이무기가 용이 되어 여의주를 입에 물고 하늘에 오르려는 형국이라 했는데, 그 여의주가 바로 태봉산이다. 태봉산이 태봉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인조의 왕자의 태를 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68년에 지역 구획정리 사업으로 태봉산이 없어졌는데, 당시 마을의 노인들은 이러한 광주의 지세를 들어 이 계획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채록/수집 상황]

1985년에 광주시에서 간행한 『광주시사』에 수록되어 있다.

1990년에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옛날 사람들은 광주의 지형을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화룡승천’의 형국이라 했다. 무등산의 두 지맥이 마치 두 마리의 뱀과 같다고 하였다. 하나는 원효사 뒤의 화암봉을 지나 지산동 쪽으로 뻗고, 다른 하나는 증심사 뒤에서 수원지를 거쳐 조선대학교전남대학교 병원 뒤로 뻗어 있다. 이 뱀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 이무기가 되고 용이 된다. 이무기가 용이 되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르는데, 이 여의주가 바로 태봉산이다. 태봉산이 태봉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인조(仁祖)[재위 1623~1649]의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왕자의 태를 묻었기 때문이다.

1624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내려왔을 때 인열왕후가 왕자를 낳았다. 이 왕자는 태어나자마자 병을 앓았다. 왕후가 왕자를 위해 백일기도를 하던 중에 백발의 도승이 나타났다. 도승은 왕후에게 왕자가 아픈 것은 태를 잘못 묻었기 때문이라며, 전라도 광주에 여의주 모양의 작은 산이 있으니 그곳에 금과 함께 태를 옮겨 묻으라고 하였다. 왕후는 도승의 말대로 태를 옮겨 묻었고, 왕자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1928년 7월 광주에 극심한 가뭄이 발생하자, 마을 주민들이 태봉산의 암장묘를 파헤쳐야 비가 내린다고 하였다. 이때 왕자의 태가 안치된 태실과 태항아리와 금박이 발굴되면서 태봉에 얽힌 전설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 태실은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있다. 그리고 함께 발굴된 백자 태항아리와 명기석반(銘記石盤), 금박(金箔)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광주의 태봉산은 1968년 지역 구획정리 사업을 통해서 없어졌다. 이때 마을의 노인들은 광주의 지세를 들어 이 계획을 반대했다. 광주의 형국인 ‘화룡승천’의 형국은 여의주인 태봉산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티프 분석]

「태봉산과 여의주」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 얻기’이다. 광주광역시의 신안동 태봉은 인조의 왕자 태를 묻은 작은 산이다. 왕자가 태어나면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며 태를 묻을 자리를 찾게 된다. 여의주 형국이라는 광주의 태봉산에 왕자의 태를 묻었고, 왕자는 건강하게 자랐다. 그리고 이 여의주 형국의 태봉은 풍수 전설에서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며, 광주를 발전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여의주 형국의 태봉산이라는 명당은 개인적으로는 왕자의 병을 치료하고, 지역적으로는 고을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상징이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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