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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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最初-天主敎會北洞天主敎會 |
영어공식명칭 | Bookdong-Catholic |
이칭/별칭 | 북동성당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은옥 |
[정의]
광주광역시에 최초로 건립된 성당.
[개설]
북동천주교회는 1938년 완공된 후 광주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된 1957년 1월 헤롤드 대주교는 북동천주교회를 광주대목구 주교좌성당으로 축성하였고, 1983년 새 주교좌성당으로 축성한 임동대성당과 함께 64년째 주교좌성당으로서 위상을 지켜오고 있다.
[건립경위]
북동천주교회는 전라남도 지역이 광주교구로 승격하던 1937년 제4대 주임신부 토머스 퀸란(Thomas Quinlan) 신부가 광주 지역에 성당을 신축하기 위하여 부지를 북동에 매수하여 건평 37평[약 11.2㎡]의 목재 성당을 신축하였다. 건축 총책임자는 성당 건축 분야로 경험이 풍부했던 중국인 교우 가요셉으로, 성당 설계 및 공사를 맡아 1938년 6월에 완공하였다. 북동천주교회는 광주 지역의 첫 서양식 성당이자 골롬반외방선교회가 한국에 지은 첫 번째 성당이다.
[건물구성]
1930년대 지어진 전형적인 성당 건축 양식의 북동천주교회는 대지 1,300평[약 393.9㎡]에 폭 9.3m, 길이 25.5m의 가늘고 긴 사각형 모양의 평면으로 정면에 종탑이 있고, 좌측에 제의실과 고해실을 배치하였다. 천주교회의 뒤편은 사각형으로 모서리를 꺾어 건축하여 제대와 감실로 사용하고 그 가운데 4개의 반원 계단을 만들어 제단에 다다르도록 설계하였다.
건물 외벽은 45cm 높이의 큰 돌을 주춧돌로 하여 붉은색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종탑과 창틀, 문은 화강석으로 원형 또는 반원형 아치를 만들어 장식하였으나, 그에 비해 건물 내벽과 천장은 흰색 회만 발라 마감 처리하여 신자들이 제대를 중심으로 예식에 집중할 수 있도록 단순하게 구성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출입구와 예배실 사이에 큰 둥근 돌기둥 두 개를 세워 경계로 이용하였고 위층에 발코니를 두어 성가대석으로 사용하고 있다. 성당 입구에는 2개의 석조기둥만 받쳐 놓아 성당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변천]
북동천주교회는 몇 차례의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건립 50주년을 맞이하여 1987년 7월 박영웅 주임신부의 주도로 성당 건물 좌측에 있던 제의실을 헐고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50평 규모의 소성당을 증축하였고, 나무 마룻바닥을 대리석으로 교체하는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또한 성당 창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작품화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교체하였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색이 변하지 않도록 전통 기법에 특수 안료를 사용하여 화려함과 신비감을 더해 주고 있다. 1993년, 2002년 두 차례 지붕 재보수를 하였으며, 2004년 광주광역시청 문화재관리과 주도로 성당 내부 공사를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북동천주교회 내부에서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제대는 천주교 전통 제대가 남아 있는데, 이러한 전통 제대는 우리나라에서도 흔치 않아 의미가 있다.
[함평 고구마사건과 5.18민주화운동]
북동천주교회는 함평 고구마사건과 관련하여 1978년 4월 24일 피해 농민, 가톨릭농민 회원, 농민운동가, 사회운동가, 천주교 신자들이 북동천주교회에 모여 농민대회를 개최하였다. 함평 농민 60여 명은 북동천주교회에 모여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였고, 윤공희 대주교와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단이 '함평 고구마 피해 보상을 위한 농민의 기도회'를 집전했다. 이에 경찰은 성당의 문을 폐쇄하고 미사를 금지하였다. 이에 북동천주교회 신부들이 호소문을 발표하여 천주교 광주대교구와 농민회도 지지 의사를 밝혔다. 20개월 만에 사태 해결이 되었을 때 북동천주교회와 신자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북동천주교회는 광주 5.18민주화운동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금남로 시위대가 계엄군에 밀려 시위에 참가했던 200~300여 명의 학생들이 북동천주교회로 몰려들었고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계엄군이 성당으로 진입하자 정규완 주임신부는 성당 내 진입을 강경하게 막아섰다. 학생들은 북동천주교회 담을 넘어 도피했지만 정규완 주임신부는 계엄군에 연행되어 한 달 만에 석방되었다. 또한 서강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의기는 1980년 5월 19일 북동천주교회에서 예정된 함평 고구마 농민투쟁 승리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전날 5월 18일에 광주에 와서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하였다. 계엄군의 진압 3일 뒤 1980년 5월 30일 김의기는 서울기독교회관 6층에서 광주에서 일어난 계엄군에 의한 학살을 알리는 전단을 뿌리고 몸을 던져 사망했다.
[의의 및 평가]
1933년 광주의 첫 본당으로 설립된 북동천주교회는 1967년까지 남동, 곡성, 화순, 계림동, 월산동, 임동 등 총 6개의 본당을 분할시키면서 광주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섰다. 북동천주교회는 임동성당과 더불어 주교좌 성당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교좌 성당이란 주교가 직접 관할하고 미사도 주관하는 교구의 중심 본당을 의미한다. 그래서 북동천주교회는 광주광역시의 수난사를 함께한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 신자들이 간첩 혐의로 체포·억류되었다.
제2대 광주교구장이었던 와기도 몬시뇰 신부는 북동성당에서 일본어 통역을 두고 강론과 미사를 진행하여 신자들이 발길을 끊는 상황이 생겼다. 그러나 와기나 몬시뇰 신부가 북동천주교회에 있었던 덕분에 북동천주교회는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북동천주교회는 6.25전쟁 당시 인민군 주둔지로 사용되었으며 성당과 사제관 여기저기에는 총탄 흔적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어 광주 역사의 애환을 보여 주고 있다. 북동성당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도 참여할 수 있는 신성학술강습원을 열어 교육하였고, 양재학원을 설립하였으며 1947년 성심유치원을 개원하는 등 광주 교육에 힘을 쓰며 시민들과 함께했다.
북동천주교회는 1992년 6월까지 광주공용터미널과 마주하고 있어서 '터미널 성당'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지금은 구 터미널 자리에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서 '터미널 성당'이라는 별칭은 잃었지만 여전히 천주교 신자들과 광주시민들의 쉼터로 사랑 받고 있다.
북동성당은 현존하는 광주 최고(最古)의 천주교회 건물로서 일제 시대에 지어진 한국교회의 건축 양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교회 건축사적으로도 높은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1999년 4월 30일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