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1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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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暎均 |
영어공식명칭 | Choe Yeonggy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보라 |
[정의]
일제강점기 광주 3.10만세운동에 참여한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독립유공자.
[개설]
최영균(崔暎均)[1900~1971]은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교사리[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양동 및 남구 서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영균(崔煐均)이다. 1919년 3월 10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전라남도 광주의 독립만세 시위는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시위에 대한 계획과 사전 준비가 진행되었다. 김철(金鐵)[김복현(金福鉉)], 최한영(崔漢泳) 등과 기독교인들이 모여 광주의 큰장날인 1919년 3월 8일 시위를 결행하기로 하고 각각 준비를 분담하였지만, 준비 차질로 말미암아 실제 거사는 작은장날인 1919년 3월 10일에 일어났다.
최영균은 전라남도 광주 시내 각 학교 학생들이 작은장날 장터에 모일 수 있도록 학생 동원을 책임지고 담당하였다. 시위를 위한 사전 준비 후, 1919년 3월 10일 시위 군중을 이끌고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내를 행진하였다. 일제 경찰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하고 주동자들을 강제 연행하였는데, 최영균도 이 일로 체포되어 1919년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영균은 1971년 1월 6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