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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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浦- |
이칭/별칭 | 나리포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나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두성혜 |
최초 설립지 | 나리포 설립지 -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나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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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나포나루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나포리 |
성격 | 나루터 |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나포리에 위치한 나루터이자 포구.
[개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임피현의 나포(羅浦), 서포를 돌아나가서 옥구현 군산진 앞바다에 닿는다. 나리포창(羅里浦倉)은 나포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나포에 나리포창이라는 창고가 있었으며, 나포를 나리포로도 지칭했음을 알 수 있다.
[건립 경위]
‘나리포’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인 1720년(숙종 46) 진휼청에서 공주·연기의 입구인 나리촌에 설치한 점포에 근원들 두고 있다. 나리촌이 금강 하류인 나포로 옮겨진 것은 1722년(경종 2)의 일이다.
나포는 금강을 가운데 두고 군산시 나포면 원나포와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죽산리를 연결하는 나루터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나포[나리포]의 용도는 도서 지역에 가뭄이 들면 내륙의 미곡과 섬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을 물물 교환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공용 임시 시장으로도 이용되었다.
[변천]
『여지도서』에 “임피현의 나포(羅浦), 서포를 돌아나가서 옥구현 군산진 앞바다에 닿는다. 나리포창(羅里浦倉)은 나포리에 있다.”라는 기록을 통해 나포에 나리포창이라는 창고가 있었으며, 나포를 나리포로도 지칭했음을 알 수 있다.
『해동 지도(海東地圖)』와 『호구 총수(戶口總數)』의 북삼면 나이포리(羅而浦里) 기록을 통해 한때 표기자 일부가 ‘리(里)’에서 ‘이(而)’로 변화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대동여 지도(大東輿地圖)』의 나리포(羅里浦)와 『1872년 지방 지도』의 나포진(羅浦津), 나포(羅浦) 기록을 통해 나리포의 창고 기능이 상실되면서, 19세기 후반에는 나리포라는 지명이 소멸되고, 나포가 통칭된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신구 대조(新舊對照)』의 나포리(羅浦里) 기록을 통해 나포면의 전신인 촌락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임피현에 속하였다가 1914년 하북면과 북삼면을 통합하여 옥구군 나포면이 신설되었다. 당시 ‘나포’란 지명은 관내에 있던 유명한 포구인 나포나루에서 유래한 것이다. 1995년에 군산시에 편입되었다.
[현황]
나포[나리포]가 언제부터 포구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신증 동국 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임피현 산천조에는 “공주산은 현의 북쪽 13리[약 5㎞]에 있는데 전하는 말에 공주로부터 떨어져 나왔기에 이름 한다고 한다. 공주산 밑이 진포인데 민가가 즐비하고, 배 부리는 것을 상업으로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조선 시대 초에도 상당한 규모의 어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포에는 수많은 어선들이 배를 대고, 다양한 종류의 수산물을 객주들에게 넘겼는데, 서해 바다와 금강 하구에서 잡히던 많은 어종들이 대부분 지금은 나오지 않는다. 당시 금강에서는 강경 아래로 입포, 웅포, 나포 순서로 포구의 규모가 컸으며, 생원이라 불리던 객주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군산항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나포를 거쳐 강경으로 올라가던 항로상의 경유지 역할을 하였다. 해방 이후 군산 동부 어판장[째보 선창]에 어협 조합이 만들어지면서 객주들의 영업 자체가 불법이 되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가 한국 전쟁을 겪으며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1991년 금강 하굿둑이 완공되면서 바다와 강이 단절되자 어장과 수로의 기능을 잃고 현재는 한적한 시골 마을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