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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지역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2961
한자 龜尾地域-貫鄕-姓氏
영어의미역 Family Names, the First Ancestor Born in Gumi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집필자 김용만

[개설]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가 관할하는 지역은 과거의 선산·해평·인동 지역이다. 따라서 구미시 지역을 관향으로 둔 성씨는 선산(일명 일선)·해평·인동으로 나뉜다. 선산 지역을 관향으로 둔 성씨 중에는 김종직을 배출한 일선김씨가 유명하고, 해평 지역을 관향으로 둔 성씨 중에는 길재를 배출한 해평길씨가 유명하고, 인동 지역을 관향으로 둔 성씨는 장현광을 배출한 인동장씨가 유명하다. 특히 고려 말 조선 초 길재가 고향인 선산에 내려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고, 길재의 학통을 김숙자·김종직 부자가 계승함으로서 선산은 명실상부한 성리학의 최선진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선산)에 있다’라는 말이 생겨났을 만큼 선산 지역은 영남사림파의 기틀을 마련한 곳이었다.

[성씨와 본관]

우리나라에서 성씨의 보급은 개국시조와 그 후손인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점차 귀족·관료·평민도 유성층(有姓層)이 되어갔다. 고려시대에는 왕족·귀족·관료여야 성을 가졌으므로, 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지배층임을 의미하였다. 조선 중기가 되면 평민까지 성이 보급되어 인구의 절반 정도가 성을 가질 수 있었으나, 천민층은 여전히 무성층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 말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는 천민층이 성씨를 갖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일제에 의해 그때까지 성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거의 성을 갖게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

본관(本貫)은 930년(태조 23) 사성정책(賜姓政策)에 따라 고려왕조 성립에 기여한 집단에 대하여 고을마다 토성(土姓)을 분정한 데서 시작되었는데, 이때 그들이 본래 거주하던 지역을 각기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같은 성씨라 하더라도 본관이 다를 경우는 혈연적 친족관계가 아니라고 보아야 하며, 중국의 경우 같은 성은 모두 친족이라는 인식과 커다란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형성된 본관은 지속적으로 족세를 유지한 경우도 있었지만 유명 인물을 중심으로 파(派)가 생겨 별도의 본관을 갖기도 하고, 혼인·전란·이거 등으로 거주 지역이 바뀔 경우 그 지명을 따라 본관을 칭하게 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존하는 성씨는 예외 없이 본관을 가지고 있다.

[지리지에 나타난 구미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 나타난 자료를 통하여 구미 지역의 성씨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읍지』 등 문헌 자료에 의거하여 현재 구미시 관할 구역이 된 선산·해평·인동 지역에 관향을 둔 성씨는 다음과 같다.

선산부의 토성(土姓)으로는 김씨(金氏)·곽씨(郭氏)·문씨(文氏)·임씨(林氏)·심씨(沈氏)·진씨(秦氏)·백씨(白氏) 등 7개 성이 있으며, 내성(來姓)으로는 최씨(崔氏)·조씨(趙氏) 등 2개 성이 있고, 사성(賜姓)으로는 유씨(柳氏)가 있다. 선산에 속해 있던 해평속현의 경우 토성은 김씨(金氏)·윤씨(尹氏)·길씨(吉氏)·전씨(全氏)·손씨(孫氏) 등이고, 내성으로는 섭씨(葉氏)가 있다.

해평 지역에는 4개의 부곡이 있었는데, 토성은 전혀 없고 속성(續姓)만 있었다. 비산부곡의 속성으로 김씨(金氏)·박씨(朴氏)의 2개 성이 있고, 도개부곡의 속성으로 김씨(金氏), 가덕부곡의 속성으로 진씨(秦氏), 고아부곡의 속성으로 곽씨(郭氏)·박씨(朴氏)가 있었다. 인동현의 경우 토성으로 장씨(張氏)·유씨(兪氏)·유씨(劉氏)·심씨(沈氏)·고씨(高氏)가 있었다.

[선산의 지역적 특성과 사람들의 성향]

선산부와 그 속현인 해평현 일대는 후삼국의 쟁패지로서 군사적 요충지요, 호족 세력도 강한 지역이었다. 선산은 토질이 비옥하여 농업 생산성이 높은데다 ‘속상문학(俗尙文學: 풍속에 문학을 숭상함)’하여 재지 사류들이 운집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학문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고려 말 조선 초 길재가 고향인 선산에 내려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면서 문풍이 진작되었고, 길재의 학통을 이은 김숙자·김종직 부자에 의해 선산은 명실상부한 성리학의 최선진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라는 말이 생겨났으니 과연 그러하였다. 당시 김종직의 제자들은 중앙 정계에서 언론·간쟁 등 분야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후일 무오사화 등 수 차례의 사건으로 수많은 영남 선비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그 학문적 성향과 족적 기반은 면면히 이어져 선산 지역의 학문 발전과 인재 배출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후 선산 지역이 한국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지 못했다는 데서 선산에 대한 학계의 인식은 다소 미흡한 편이다. 선산은 성종 연간을 중심으로 영남사림파를 배출하였으며, 명종 연간에는 안동을 중심으로 이황의 영남성리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영남학파를 형성하는 성과를 얻었다.

[선산 지역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

1. 일선김씨

일선김씨(一善金氏)의 시조인 김선궁(金宣弓)해평김씨의 시조인 김훤술(金萱述)은 모두 고려 태조 왕건의 공신이었다. 김종직의 표현처럼 김선궁의 자손들은 이미 고려 초기부터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으로 분화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일선김씨의 재지사족과 이족은 모두 김선궁의 후예였음을 알 수 있다. 곽씨(郭氏)·임씨(林氏)·류씨(柳氏)는 조선시대에 사족으로 성장하였는데, 이들은 대개 사족화하면서 선산을 떠나 타읍으로 이주하였다. 김종직의 선대 혼인관계에서 호장층이었던 선산임씨·선산문씨·선산백씨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이들 성씨가 선산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기에 성주·선산 등지 토성의 상경종사가 활발해지면서 재경 관인이나 혹은 타읍 출신의 사족들이 대거 이곳으로 모여 들었다. 길재·김숙자·김종직·이맹전(李孟專)·김맹성(金孟性) 등 성리학자들이 많이 모였고, 이와 함께 왕조 교체기에 불사이군의 절의파와 세조의 등극을 반대하는 사류들이 선산 지역에 운집하게 되면서 “영남인재 반재일선(嶺南人才 半在一善)”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준록(彛樽錄)』을 통해 김종직 가계를 살펴보면, 김흥술(金興術) 이후 7대에 걸쳐 선산부의 호장직을 세습하였고, 통혼권도 고을 내의 토성이족에 한하며, 심지어 같은 김씨의 족내혼과 동성동본혼도 많았다.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역임한 5대조 김연(金延)의 아들 대에 와서 사족과 이족으로 분화되었다. 김연은 선산부의 수호장(首戶長)으로서 고려 말 왜구가 선산에 침범했을 때 군민을 금오산성에 입보(入保)시키고 문적(文籍)을 보존한 공로가 있었고, 이를 통해 사족으로 발돋움할 계기를 마련하였다.

김연의 아들 김광위가 고려 말에 명법업(明法業)으로 급제하면서 비로소 향직을 벗어나 사족화할 수 있었다. 김광위의 후손은 족세가 번창하여 문과·무과의 급제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김은유(金恩宥)김관(金琯)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으로 가계가 이어지면서 가문의 극성기를 이루었다. 김종직이 무오사화로 큰 화를 입었지만 그의 제자들에 의해 영남의 문풍이 크게 진작되어 영남의 학문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에도 일선김씨 문중에서는 많은 학자·효자·충신이 배출되었다. 『조선금석총람』에 의하면, 고려 후기 승려로 유명했던 자정국존(慈淨國尊)일선김씨로 그의 외가는 선산문씨였으며, 그의 문하에는 공경사대부 자제들이 많이 출입하였다.

2. 선산김씨

선산김씨(善山金氏)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의 여덟째 왕자인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고 있다. 김추는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으로 일선군(一善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들이 이를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의 17세손인 김성부(金成富)가 조선조에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짐으로써 명문으로 번성하였고, 그의 아들 김경도(金敬道)와 김경적(金敬迪)은 교수(敎授)를 지냈다.

의학에 밝은 김취성(金就成)은 『진락당집(眞樂堂集)』을 저술하였다. 김취문(金就文)은 청백리로 유명하며, 사성과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김종무(金宗武)안동 풍산류씨 유중영(柳仲郢; 유성룡의 부친)의 사위이다. 김종무는 찰방 벼슬을 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상주 북천 전투에서 순국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상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고아읍 원호리에 있는 김종무 충신정려비는 1999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김천영(金天英)선산김씨 문중을 빛낸 인물이다. 김천영은 세자사부(世子師傅)로 천거되었으나 거부하고 금오산에서 여생을 마쳤다. 이 외에도 선산김씨 문중에서는 조선 말기까지 많은 관료가 배출되었으며, 해방 후 지금까지 현달한 인물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구미 지역의 대표적인 성씨로 손꼽힌다.

3. 선산임씨

선산임씨(善山林氏)는 당나라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신라에 와서 임씨의 원조가 된 임팔급(林八及)을 도시조(都始祖)로 하며, 신라 경순왕의 손서(孫壻)로 중랑장을 지낸 임양저(林良貯)를 시조로 하고 있다. 임양저가 신라 경순왕의 고려 귀순이 부당함을 극구 간언하다가 선산으로 유배되어 생애를 마치게 되면서 그를 득관조(得貫祖)로 하게 되었다. 고려 말기 공민왕 때 태어나 조선 태조 때 이조좌랑을 지낸 임만(林蔓)을 중시조로 하고 전라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영암·강진·무안 등지에서 번영된 세계를 잇고 있다.

4세손 임득무(林得茂)는 세종조에 이조판서를 지냈고, 장자 임종(林宗)과 차자 임수(林秀)를 두었다. 임수의 4자인 임우정(林遇貞)은 대사성을 역임하였고, 임수의 차자인 임우형(林遇亨)은 성종조에 일선부원군에 책봉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임우형은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다. 차자 임억령(林億齡)이황·이이와 우의가 두터웠으며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삼자 임백령(林百齡)은 대사헌·이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장자 임천령(林千齡)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오자 임구령(林九齡)도 정난위사이등공신(靖難衛社二等功臣)에 책록되고 남원부사를 역임하는 등 형제들이 출세하면서 명문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조선 말기까지도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4. 선산문씨

선산문씨(善山文氏)는 남평문씨(南平文氏)에서 분적(分籍)된 것으로 전해진다. 시조는 문영(文英)으로 대사성을 지냈다. 『조선씨족통보』에는 군수를 지낸 문계창(文繼昌) 또는 문자인(文自仁)의 후손이 전해온다고 하였다. 1985년을 기준으로 선산문씨는 70명이 집계되었다.

5. 선산유씨

선산유씨(善山柳氏)의 시조 유지비(柳之庇)는 문화유씨 시조의 9세손인 유순(柳淳)의 아들이며, 선산군(善山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문헌이 실전되어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중간에 전라도로 이주하였고, 16세기에 유희춘(柳希春)·유성춘(柳成春) 형제가 문한지임(文翰之任)을 담당하면서 호남 지역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85년 당시 2,35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평 지역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

해평을 관향으로 하는 김씨(金氏)·윤씨(尹氏)·길씨(吉氏)는 고려시대 이래 사족으로 성장하여 계속 관직에 나아갔다. 해평길씨  길재가 선산에 내려와 제자를 가르쳤고, 일선김씨 김종직 부자가 그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선산은 15세기 영남사림파 형성의 중심지가 되었다. 해평의 토성 가운데 김씨와 길씨는 재지 사족으로 나타난다.

1. 해평김씨

해평김씨 시조인 김훤술(金萱述)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여 일등공신에 녹선되고, 삼중대광보국문하시중(三重大匡輔國門下侍中)에 올랐으며, 시호는 장렬(莊烈)이다. 시조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상고할 길이 없어 고려시대에 홍호시전직(弘虎寺殿直)을 지낸 김태(金兌)를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그 후예로 고려 말기 김수(金洙)는 대사간·직제학·개성부윤을 역임하였고 공민왕 때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졌다. 조선이 건국되자 예조판서를 역임한 후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후 김주(金輳), 김종직의 문인 김맹성(金孟性)·김맹치(金孟恥) 등 영남사림파에 속하는 인물이 나왔다. 김맹성김종직과 동향인·동지인(同志人)으로 정의가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사돈 간이었고, 성리학의 윤리를 몸소 실행하는 전형적인 사림파 인물이었다. 김맹성안순(安純)의 외손으로서 내외 친족이 조정에 포열해 있었으나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2. 해평윤씨

해평윤씨의 선대는 고려 무신난 때 무반으로 진출한 가문으로, 고려 명종조에 출사한 윤선지(尹先之)가 중대광병부상서상장군(重大匡兵部尙書上將軍)을 지냈고, 시조 윤군정(尹君正)은 고려 고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판공부사(判工部事)를 역임하였다. 시조의 아들 윤만비(尹萬庇)충렬왕 때 기사일등공신(己巳一等功臣)으로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지냈다.

3세손 윤석(尹碩)이 고려 충숙왕 때 충근절의동덕찬화보정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保定功臣)에 책록되고 도첨의사사·좌정승을 거쳐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에 이르렀으며, 치사 후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해평을 본관으로 삼았다. 4세손 윤지현(尹之賢)·윤지표(尹之彪) 형제가 있으며, 조선 초기에는 윤사수(尹思修)·윤은보(尹殷輔) 등 고급 관료를 배출하였다. 조선 전기에 한때 침체하였다가 16세기 후반에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 형제가 등장하면서 다시 족세가 번창하였다.

3. 해평길씨

해평길씨는 본래 현리(縣吏)에서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한 가문이다. 길재의 행장에 의하면, 해평길씨 선대의 세계는 길시우(吉時遇) → 길보(吉甫)·길원진(吉元進) → 길재(吉再)로 이어지는 고려 말 신흥사대부 계열에 속한다. 길재정몽주와 함께 조선 초기에 대표적인 충신으로 국가적인 포숭(褒崇)을 받았다. 길재의 학문이 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면서 선산 지방에 영남사림파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여계명현집(麗季名賢集)』에 실린 「야은선생언행습유(冶隱先生言行拾遺)」에 의하면, 그의 후손은 선산과 금산에 분거하였는데 대체로 족세가 미약하였다.

[인동 지역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

인동현(仁同縣)은 본래 신라의 사동화현(斯同火縣)이었다. 후에 수동현(壽同縣)이 되었다가 신라 경덕왕 때에 이르러 인동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현종 때 경산부(京山府; 지금 성주)에 속했으며, 1363년(공민왕 12)에는 감무를 두었고 약목현에 속하였다. 1604년(선조 37)에 부로 승격하였고,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된 이후 1914년에 칠곡(漆谷)에 병합되었다. 1977년 구미읍과 인동면의 합병으로 경상북도 구미지구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8년 구미의 시 승격으로 구미시 인동동이 되었다. 인동현의 토성은 장씨(張氏)·유씨(兪氏)·유씨(劉氏)·심씨(沈氏)·고씨(高氏) 등이다.

1. 인동장씨

현재 인동장씨는 장계(張桂)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여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인동장씨 직제학계는 고려 건국 과정에서 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 된 장정필(張貞弼)을 도시조로 한다. 지금도 안동 태사묘에서 삼태사(김선평·권행·장정필)를 모시고 춘추 향사를 지내고 있다.

직제학계의 시조 장계는 장정필의 14세손으로 고려 충렬왕 때 등과하여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고,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다. 인동현에 거주하면서 인동을 본관으로 하였다. 옥산(玉山)은 인동의 별호이다. 장계의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성곡동 발영전에 있다. 2세손 장보(張俌), 3세손 장용서(張龍瑞), 6세손 장자원(張自遠)으로 이어진다.

7세손 장말손(張末孫)은 조선 세종 때 태어났으며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정충출기적개이등공신(精忠出氣敵愾二等功臣)이 되었고, 예조참판·세자우빈객에 올랐다. 그가 남긴 각종 고문서와 유품이 보물 제881호와 제1005호로 지정되었다. 장순손(張順孫)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지춘추관사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갑자사화 때 형을 받았으나 중종반정으로 풀려났고 영의정에 올랐다.

상장군계의 시조인 장금용은 고려조에서 삼중대광신호위장군(三重大匡神虎衛將軍)을 지냈다. 후손들이 옥산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옥산으로 하여 천년을 이어온 오랜 씨족이다. 조선 말기 옥산이 인동으로 개칭되자 관향을 인동으로 고쳤으나 그대로 옥산을 본관으로 하는 후손도 있다. 장금용의 묘소는 구미시 인의동에 있다. 14세손 장보(張俌)의 자손들은 인동·성주 등지에 살다가 18세 이후로는 예산·진주·하동·원주·상주·무안·은진·공주·서천 등지에 살고 있다. 고려조의 인물로는 장선(張善)·장안세(張安世)·장중양(張仲陽)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정승 1명, 왕비 1명, 문과급제자 55명을 배출하였다.

학문으로 인동장씨를 대표하는 장현광(張顯光)은 1595년(선조 28)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이 되었으나 곧 물러났으며, 조정에서 이조판서·대사헌 등 벼슬로 20여 차례나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인동에 묻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군(州郡)에 격문을 보내 근왕의 병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성리학자로서 장현광은 ‘덕(德)은 도(道)의 지선(至善)한 것이라’고 논하고 ‘이기(理氣)는 체용(體用)이 될 뿐으로 경(經)과 위(緯)로 분석할 것’을 주장하였다. 허목(許穆)·김응조(金應祖)·전식(全湜) 등이 그의 문하생이다. 1637년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해안 입암산에 들어가서 생을 마쳤다.

팔도도원수를 역임한 장만(張晩)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고, 장붕익(張鵬翼)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을 세우고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장사진(張士珍)은 임진왜란 때 유생으로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구한말 망국의 의분을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토로한 장지연(張志淵), 일제에 강점당한 후 단식절명한 장기석(張基奭),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자결한 장진홍(張鎭弘) 등 수많은 인물이 나왔다.

2. 인동유씨

인동유씨(仁同兪氏)유승단(兪升旦)을 시조로 하며, 후대에 이르러 인동을 관향으로 삼았다. 유승단은 고려 고종의 사부로서 추밀원부사를 역임한 후 집현전태학사를 거쳐 인동백(仁同伯)에 봉해졌다. 후대에 시정공파(寺正公派)·어모공파(禦侮公派)·참의공파(參議公派)·참봉공파(參奉公派) 등 8개 공파로 분적되어 세거하면서 많은 명현과 인재를 배출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인동유씨의 주요 세거지는 인동이었다. 1699년(숙종 25) 인동부사 장유(張瑠)가 간행한 『옥산지(玉山誌)』에 시조 유승단의 묘지 및 가택의 소재가 명기되어 있는 것이 한 예이다. 1세손 유승석(兪承碩)의 동생 유성렬(兪成烈)의 증손 유면(兪勉)이 인동의 이웃 지역 선산 부근 봉황장원장(鳳皇壯元場)에 살았음이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세계를 정리해 보면, 시조 유승단(이후 세계 실전) → 중시조 유승석(兪承碩) → 2세손 유수기(兪守基) → 3세손 유서(兪瑞) → 5세손 유사철(兪師哲)로 이어졌다. 한편 조선 성종 때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춘추관수찬관을 역임한 유진(兪鎭)은 9세손으로 종문의 번성을 마련한 대표적 인물이다. 유적으로는 유진 신도비가 있다.

이용자 의견
장** 인동장씨대종회
연락처 : 0537434365
http://www.indongjangssi.or.kr/
  • 답변
  • 디지털구미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잘못된 부분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면 수정하는데 있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메일(kbc6541@aks.ac.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2020.04.03
장** 인동장씨 부분 대부분 잘못되었습니다. 인동장씨대종회에 문의하셔서 모두 삭제하시고 정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답변
  • 디지털구미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잘못된 부분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면 수정하는데 있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메일(kbc6541@aks.ac.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2020.04.03
장* "인동장씨" 란에서 "인동장씨는 ... 장정필(張貞弼)을 도시조로 하지만, 종파 간 의견의 일치를 보지는 못하였다. ... 춘추 향사를 지내고 있다."를 삭제해 주십시요. 상장군계에서는 역사적인 고증을 바탕으로 장정필을 도시조로 하지 않습니다. 직제학계만 장정필을 도시조로 합니다. 삭제하지 않을 시에는 종친회를 통해 구미시에 이의를 제기하겠습니다.
  • 답변
  • 디지털구미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2019.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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