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06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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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嶺南士林 |
영어의미역 | Yeongnam Literati |
이칭/별칭 | 선산사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조선시대 구미 지역을 중심으로 성리학통을 전개한 유학자들.
[사림 형성 배경]
해평길씨 길재가 정몽주의 학통을 이어 받아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쳤고 선산김씨 김종직 부자가 그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선산은 15세기 영남사림파 형성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고려 말에 성주·선산 등지 토성들의 상경종사(上京從仕)가 활발해지자 재경 관인이나 혹은 타읍 출신의 사족들이 대거 선산 지방으로 모여 들었다. 길재·김숙자·이맹전·김맹성 등 성리학자들, 그리고 왕조 교체기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파와 세조의 등극을 반대하는 사류들도 선산 지방에 운집하였다. ‘영남 인재의 반이 일선(一善: 선산)에서 났다’는 말이 유행한 것은 선산 지방이 당시 성리학의 중심지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정통 성리학의 학통을 계승한 길재가 선산에 낙향하여 지방 자제에게 성리학을 강수하자 문풍이 크게 진작되었고 그것이 다시 김종직의 부자에게로 이어지면서 전국에서 사류들이 모여 들었다. 비안의 박서생, 진양의 하담, 성주의 이맹전, 신천의 강신, 울산의 오식, 인동의 유면, 담양의 전가식, 지례의 서극, 밀양의 박영 등이 그 예이다. 선산은 토질이 비옥하여 농업 생산성이 높은데다가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높아 재지 사족들이 운집할 수 있는 사회적·경제적 및 학문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해평의 토성 가운데 김씨와 길씨는 재지 사족으로 나타난다. 해평윤씨는 이미 고려 명종조에 출사하여 중대광 병부상서 상장군을 지낸 윤선지를 비롯하여 윤군정·윤만비·윤가관·윤진 등 고관 요직을 역임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해평윤씨는 조선 초기에 한때 침체하였다가 16세기 후반에 윤두수 형제가 등장하면서 김맹성·김맹치 등 영남학파에 속하는 인사가 나왔다. 그런데 해평윤씨와 해평김씨의 이족 관계 자료는 찾아 볼 수 없다.
해평길씨는 본래 현리에서 과거를 통해 사족으로 진출한 가문이다. 길재의 행장에 의하면, 그의 세계(世系)는 길시우-길보-길원진-길재로 이어지는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 계열에 속한다. 조선 초기에 길재는 정몽주와 함께 대표적인 충신으로 국가적인 포상을 받았고, 길재를 중심으로 선산 지방에 영남학파 형성의 기반이 마련되어 갔다. 길재의 후손은 선산과 김산에 분거하였는데 대체로 족세가 미약하였다.
[영남학파의 형성 과정]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된 성리학은 16세기 후반에 접어들자 사림 세력의 정계 장악과 함께 정치적으로는 동서 분당(東西分黨), 학문적으로는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로 분열되었다. 영남학파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에 의해 형성된 학통을 말한다.
영남학파는 15세기 후반 김종직(金宗直)을 영수로 한 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와는 달리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학(禮學)을 바탕으로 한 사변적(思辯的)인 성리학을 더욱 중시하였다. 그리고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에 대칭되면서 학문적으로는 주리론(主理論), 정치적으로는 동인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황과 조식은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동서 분당 이전에 일생을 마치면서 각기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를 대표하여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형성하였다.
[영남학파의 분화와 발전]
영남학파는 1575년(선조 8) 동서 분당 때 퇴계와 남명의 문인이 함께 동인 편에 섰으나 뒤에 기축옥사(己丑獄死)를 계기로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면서 퇴계 문인은 주로 남인, 남명 문인은 주로 북인 편에 서게 되면서부터 두 학파는 서로 학문적 입장과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정인홍의 북인 세력이 집권하는 선조 말에서 광해군 대까지는 남명학파가 다소 득세하였으나 정인홍의 지나친 행위 때문에 이탈자가 계속 늘어났고,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인홍이 처형됨으로써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남명학파의 일부는 경상좌도의 퇴계학파로, 일부는 서인 편으로 전향하였다. 나머지 일부 세력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가담함으로써 마침내 노론(老論) 정권으로부터 철저한 보복을 받았다.
유성룡과 정인홍의 치열한 남북 대결에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유림이 크게 분열되자 퇴계와 남명 두 사문을 출입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산음 출신의 동계(桐溪) 정온(鄭藴)과 함께 경상도의 유림을 화합하는 데 크게 힘을 기울였다. 특히 퇴계와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정구와 장현광(張顯光)이 선산과 이웃인 성주(星州)·인동(仁同) 등을 기반으로 성장하면서 17세기부터는 점차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