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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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靈主山城 |
영어음역 | Goryeong Jusanseong |
영어의미역 | Goryeong Jusanseong Fortress |
이칭/별칭 | 이산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 산 3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류영철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고령 주산성 사적 제61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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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고령 주산성 사적 재지정 |
성격 | 성곽 |
양식 | 산성 |
건립시기/연도 | 가야시대 |
높이 | 2~2.5m |
둘레 | 1,351m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 산 3 |
소유자 | 국유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에 있는 대가야시대 석축 산성.
[개설]
고령 주산성은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진산(鎭山)인 주산(主山)에 위치한 대가야시대의 산성이다. 주산은 해발 310m 내외의 나지막한 산으로 남북의 두 봉우리가 사람의 귀 모양을 하고 있어 이산(耳山), 대가야읍에서 으뜸이라고 하여 주산, 산 중턱에 옛 무덤이 아홉 봉우리를 이루어 남북으로 뻗어 있어 구미산(九尾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고령현 산천조에는 “이산(耳山)은 현의 서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와 읍지, 대동여지도 등의 고지도에도 대부분 ‘이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령 주산성의 원래 명칭은 이산성(耳山城)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이산성은 모두 두 곳에서 보인다. 먼저 「신라본기」는 673년(문무왕 13) 9월에 국원성(國原城)을 비롯해 이산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지리지」에는 ‘유명미상지분(有名未詳之分)’, 즉 이름만 있고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이산성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언급된 이산성은 현재 고령 주산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문헌비고(文獻備考)』의 성지조에는 “고성(古城)이 이산에 있는데 옛터가 있다”고 전한다.
[건립경위]
고령 주산성은 대가야와 관련된 문헌 자료가 전하지 않고, 또 정식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표 조사 결과 고령 주산성 안에는 대가야시대 토기가 발견되고 있어 대가야시대의 산성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와 함께 인화문 토기 등 신라 토기와 기와, 전돌, 숫돌 등도 함께 출토되었다. 고령 주산성은 대가야시대 왕궁을 방어하기 위한 배후 산성으로, 유사시 피난하여 항전하기 위한, 즉 대가야의 산성 방어를 위한 주성(主城)이었을 것이다.
대가야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령 주산성은 신라가 백제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신라 외곽을 방어하기 위한 거점 산성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673년에 이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새롭게 산성을 축조한 것이 아니라, 대가야시대 이래 전해오던 산성을 수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치]
고령 주산성은 대가야읍 연조리 산1번지와 중화리 산3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백두대간의 일맥인 가야산에서 뻗어나온 문수봉, 미숭산의 줄기 하나가 동쪽으로 뻗어 형성되었다. 고령읍에서 고령 주산성에 오르는 길은 현재의 고령향교 방향에서 올라가는 길과 대가야박물관에서 고령 지산동 고분군을 거치는 길이 있다.
[형태]
고령 주산성은 북고남저의 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는데, 북쪽의 정상부는 해발 310m 내외이고 남쪽은 해발 180m 내외이다. 고령 주산성은 주산 정상부에서 6부 능선을 가로 지르며 쌓았고, 정상부에는 내성을, 그 남쪽에는 외성을 쌓았다. 내성의 전체 둘레는 711m 정도이고, 외성의 전체 둘레는 1,035m이다. 외성이 내성의 북벽과 서벽에 잇대어 축조되어 산성 전체의 일주 둘레는 1,351m 정도이다.
고령 주산성은 자연적인 지형의 굴곡을 따라 쌓은 부정형의 석성으로 급경사를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다. 성벽은 대부분 유실되어 있는데, 석재는 자연석과 장방형의 할석을 사용하였다. 자연석과 할석을 섞어 매단을 횡으로 평평하게 쌓았고 상·하단은 층단식으로 쌓았는데, 돌과 돌 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워 보강하였다. 석벽 축조 방법은 대부분 내탁법(內托法)을 채택하였으나, 내성 서벽의 일부 구간에는 협축법(夾築法)을 사용하였다.
[현황]
정밀 지표 조사 결과 고령 주산성에서는 성내에 치 8개소, 추정 건물지 2개소, 연못지 1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치는 모두 반원형이며, 장방형의 할석을 이용하여 쌓았다. 가장 잘 노출되어 있는 곳은 4~7단으로 남아 있으며, 복의 높이는 1m 내외이다. 또 내성의 서쪽과 외성의 동쪽 등 두 곳에서 추정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더불어 연못지도 한 곳에 남아 있다.
출토 유물은 토기와 기와가 다량으로 채집되었다. 토기류는 덮개, 그릇받침, 항아리, 손잡이 등이다. 와전류는 암막새, 수키와, 암키와, 전돌 등이 채집되었다. 토기는 대가야시대 것이 주를 이루며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것도 확인된다. 기와는 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것으로 편년된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6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신라와 대가야에서는 5세기 초 이전부터 왕궁 부근에 방어를 위한 산성을 축조하였다. 고령 주산성도 대가야 궁성지의 배후에 축조된 산성이었다. 따라서 고령 주산성은 외곽 지역의 방어 라인이 무너졌을 경우 장기간의 항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내성과 외성을 함께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고령 주산성은 『삼국사기』에 이름만 전해오던 산성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이곳에는 대가야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토기편, 기와편, 전돌 등이 채집되고 있다. 따라서 고령 주산성은 대가야시대 도성 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기능하였고, 대가야시대 이후에도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기 위한 외곽 거점성으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신라 문무왕 대에 이산성을 새롭게 수축한 것으로 보아 통일 후에도 지속적으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