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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당마을과 염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651
한자 檢堂-鹽井
영어음역 Geomdang Maeulgwa Yeomjeong
영어의미역 Geomdang Village and a Salt Well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검당마을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손앵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설|지명 유래담|보은담
주요 등장인물 검단선사|도적떼
관련지명 심원면 월산리 검당마을 지도보기
모티프 유형 도적을 회개시킨 스님|은혜에 보답하는 보은염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검당마을에서 천일염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검당마을과 염정」선운사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인근의 도적들을 개과천선시키고 천일염 제조법을 가르쳐 새로운 삶을 열어준 데서 검당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담이다. 또한 수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검단선사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씩 선운사에 소금을 바쳤다는 보은담이기도 하다.

[채록/수집상황]

1992년 고창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고창군지』 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심원면 월산리 검당마을은 1960년대만 해도 3백여 가구가 천일염을 생산하여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산림법과 전매법 등 관계법에 묶여 천일염 생산이 어려워짐에 따라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은 이름만 남아 있을 뿐 염전으로서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검당마을과 염정에 얽힌 전설은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400년 전 검단선사선운사를 창건할 즈음 선운산 계곡에는 많은 도적들이 살고 있었다. 도적들은 금품을 강탈하고 행패를 부리는 등 민폐를 거듭했다. 검단선사는 이들 도적을 깨우쳐 민폐를 막으려고 술수를 쓰기에 이르렀다. 도적들은 무력으로는 도저히 검단선사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음인지 선사에게 생업을 인도해 달라고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선사는 선운산에서 3㎞ 쯤 떨어진 바닷가에 진흙으로 샘[井] 같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샘에 바닷물을 부었다가 수분을 증발시켰다. 샘 안에 있는 바닷물은 그렇게 며칠 동안 수분이 증발된 뒤 샘 바닥에 하얀 결정체를 남긴다. 이 결정체가 바로 소금이며,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진 소금을 천일염이라고 한다. 검단선사는 이처럼 10수세기 전에 이곳 주민들에게 제염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업을 찾은 도적들은 선량한 양민으로 개과천선하여 마을을 형성하면서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누렸다는 것이다. 이곳 주민들은 자기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어준 검단선사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검당이라고 붙였다. 또한 6년 전까지만 해도 제염법을 가르쳐 준 선사에게 보답하기 위해 매년 봄가을 두 차례씩 보은염 두 가마씩을 바쳐 왔다는 것이다.

1992년 『고창군지』 에 나온 당시 마을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는 주민 신규채에 의하면, “내가 어릴 때만 해도 50여 세대가 소금을 가마에서 구워내 전국에 내다 팔아 수입이 좋았으나 이제 어패류 등을 캐어 겨우 연명해 간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시중에 나오는 맛소금보다 당시의 육염은 맛이 훨씬 좋았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검당마을 육염은 전매법에 묶여 생산이 어렵고 산림법으로 땔나무마저 구할 수 없어 자연 사양화되었다. 게다가 해일이 밀어닥쳐 육염의 피해가 가중되면서 주민들은 살길을 찾아 검당마을을 떠났다는 것이다.

[모티프 분석]

「검당마을과 염정」의 주요 모티프는 ‘도적을 회개시킨 스님’, ‘은혜에 보답하는 보은염’ 등이다. 이 이야기는 신라 원성왕 때 승려 영재(永才)가 지은 10구체 향가 「우적가(遇賊歌)」의 연기설화와 유사하며, 조선 후기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지은 「허생전」의 근원설화 중 하나로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검당마을의 이름 유래담에 해당하지만, 개과천선한 도적들이 검단선사의 은혜에 보답하여 해마다 보은염(報恩鹽)을 바쳤다는 데서 보은 모티프도 삽입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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