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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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敞竹林里支石墓群 |
영어공식명칭 | Dolmens in Gochang |
영어음역 | Gochang Jiseongmyogun |
이칭/별칭 | 고창 죽림리일대 고인돌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아산면 상갑리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김선기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4년 12월 21일 -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 사적 제391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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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 사적 재지정 |
성격 | 고분군|고인돌군 |
양식 | 탁자식|기반식|뚜껑식|지상 석곽식 |
건립시기/연도 | 청동기시대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아산면 상갑리 |
소유자 | 국유|공유|사유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와 아산면 상갑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돌무덤군.
[위치]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은 죽림리 일대에 442기이다. 세계문화유산은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에 고창읍 도산리의 5기를 포함하여 총 447기이다.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이 분포된 입지는 다음과 같다. 고창읍에서 서쪽 방향으로 약 3㎞ 떨어진 곳에 북방식 고인돌[지석묘]이 있는 도산마을이 있다. 다시 이 마을을 안고 북쪽으로 나아가면 약 1.2㎞ 떨어진 곳에 죽림리 매산마을이 있다. 매산마을은 화시봉[403.2m] 봉우리로부터 서남쪽을 향하여 활 모양으로 뻗어 내린 산 지맥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주진천[인천강] 상류인 고창천이 가로 흐르고 있다.
매산마을 뒷산은 말안장 모양의 지형으로, 서쪽으로 성틀봉[150.3m]이 있는데, 이곳에는 삼국 시대의 산성이 있다.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은 매산마을을 기점으로 동서에 걸쳐 산줄기 남쪽 기슭을 따라 무리지어 있다. 산기슭은 대체로 높이 15m 내지 50m 범위 내에 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에서 발굴 조사된 고인돌은 모두 22기에 불과하다. 최초의 발굴 조사는 1965년 국립박물관[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실시하였다. 국립박물관에서는 선사 시대 고고학 연구의 첫 과제로 고인돌을 조사하였는데, 아산면 상갑리 일원에 있는 3기의 고인돌을 김재원, 윤무병이 조사, 보고하였다. 조사 당시에 고인돌의 하부 구조는 밝혀졌으나 유물은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1991년에는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고창읍 죽림리 일원의 고인돌 성격을 규명하고 정비하고자 죽림리 Ⅱ구역 3군에 있는 17기의 고인돌을 발굴, 조사하였다. 당시 지상 석곽식이나, 여기에 주형 받침돌이 부가된 형태의 고인돌을 조사하였다. 무덤방이 지상에 있었기 때문인지 유물은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최근 조사는 원광대학교 박물관조사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2004년 태풍 루사에 의해 도괴(倒壞)되었거나 도괴될 염려가 있는 제2419호와 제2433호 고인돌의 복원을 위하여 조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수로를 확인하기 위해 실시된 2005년 발굴 조사 때에는 고인돌 하부 구조로 판단되는 유구를 조사하였다.
[형태]
상갑리 고인돌 중에는 뚜껑식 고인돌과 기반식 고인돌이 조사되었다. 뚜껑식인 A호 고인돌의 석실 규모는 길이 90㎝로, 작은 편에 속했다. 기반식 고인돌의 경우, 여러 매의 판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주변에서 부석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없었다.
죽림리 Ⅱ구역 3군에서 조사된 고인돌은 제2317호~제2333호 고인돌이다. 이 고인돌들은 남북 2열로 열을 지어 군집하고 있다. 모두 지상 석곽식에 해당하는 고인돌이다. 지상 석곽식은 탁자식과 비슷한 형식으로, 지상에 무덤방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둘의 특징이 같다. 탁자식의 경우 장벽이나 단벽을 한 매의 판석으로 축조하나, 지상 석곽식의 경우 장벽을 여러 매의 판석을 이용하여 축조하는 방식이다.
도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보조 받침돌을 고인 예도 조사되었는데, 형태는 기둥 모양의 주형 받침돌로, 2매~4매의 보조 받침돌을 괴고 있다. 무덤방의 크기는 길이 130m~160cm, 폭 40㎝ 내외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길이는 80㎝ 내외의 작은 무덤방도 확인되어 이차장법이 사용되었거나 소아용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제2419호 고인돌은 완전히 도괴되었는데, 24톤 크기의 덮개돌은 장축 단면이 장방형을 보인다. 조사 결과 네 개의 주형 받침돌을 괸 형태이다. 내부에서는 무덤방이나 부석 등의 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중앙에 받침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석재 1기가 놓여 있다. 받침돌 축조의 경우 생토층 위에 적심을 두었고, 받침돌을 세운 후 성토하면서 다지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제2433호 고인돌은 작은 개울 옆에 있는데, 습기에 의해 동남쪽 받침돌은 유실된 상태였다. 무게가 48톤인 대형 덮개돌의 장축이 단면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받침돌과 함께 두꺼비 형상을 보여 덮개돌을 선택할 때 상징성을 고려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네 개의 외부 받침돌과 중앙에 또 하나의 받침돌을 고인 형태이며, 덮개돌을 따라 바닥에 부석을 하였을 뿐 무덤방은 축조되지 않았다.
축조 지역 동쪽은 원래 개울이 있었던 곳으로, 개울로 이어지는 경사면 생토 위에 적심을 깔았고, 받침돌을 세운 후 주변에도 적심을 두면서 성토한 후 부석 시설을 두었다.
별도의 무덤방도 발굴되었는데, 제2433호 고인돌 동쪽에 있다. 무덤방은 장축 4매, 단축 1매의 석재로 축조하였다. 규모는 장축 190㎝, 단축 30㎝, 깊이 36㎝이다. 주변에 덮개돌로 판단되는 석재가 출토되었으며, 받침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석재도 확인되었는데, 이는 고인돌의 하부 구조로 판단된다.
[출토 유물]
국립박물관에서 조사한 3기의 고인돌과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조사한 지상 석곽식의 고인돌, 제2419호 고인돌에서는 전혀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유물은 제2433호 고인돌과 그 동쪽에서 노출된 매장 주체부에서만 출토되었다. 제2433호 고인돌에서는 중앙과 북쪽 받침돌 사이에서 민무늬 토기들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유실되었으며, 남아 있는 유물도 작은 조각들이다. 작은 유물들을 접합하고 분류해 본 결과 민무늬 토기 6개체분과 붉은간토기편 1점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발굴된 무덤방에서는 남쪽 단벽에서 원형 덧띠 토기 완형 1점이 깨진 상태에서 출토되었다.
[현황]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의 고인돌은 약 165,290㎡의 규모에서 1,000기 이상이 발견될 것이라고 추정되었으나, 1990년에 전라북도와 원광대학교 주관으로 이루어진 3개월 동안의 조사 결과 북방식 2기, 지상 석곽식 44기, 남방식 247기, 기타 149기, 계 442기가 확인되었다[매골된 108기를 합하여 555여 기가 확인되었다]. 고인돌의 크기는 길이 1.0m 미만에서 최대 5.8m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총 442기 중 3.0m 미만이 80%, 3.0m 이상이 20%, 4.0m 이상은 21기였고, 그중 6기는 5.0m 이상이었다.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은 강화 지석묘군, 화순 지석묘군의 고인돌과 더불어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특히 죽림리와 상갑리 일원의 고인돌은 사적 제391호로 지정되었다.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약 1.7㎞ 거리에 약 442기의 고인돌과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고인돌 등 모두 500여 기가 확인되어 세계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밀집, 분포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형식도 다양하여 2기의 탁자식 고인돌을 비롯, 뚜껑식 고인돌, 기반식 고인돌이 함께 모여 있다. 기반식 고인돌이 주류를 이루는데, 받침돌이 기둥 모양인 것이 특징이다. 이외에 여러 매의 판석으로 짠 지상 석곽식, 탁자식, 그리고 지상 석곽식에 주형 받침돌이 결합된 다양한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이로 보아 탁자식을 대표하는 북쪽 지방 문화와 기반식을 대표로 하는 남쪽 지방 문화가 결합된 것으로 판단된다. 발굴 조사 후 고인돌은 모두 복원되었다. 1994년 12월 21일 사적 제39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지상 석곽식 등 대부분의 고인돌에는 유물을 부장하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다. 소형의 매장 주체부는 이차장법이나 소아장의 유습으로 판단된다. 또한 매장 주체부를 축조하지 않은 고인돌에서도 부장적인 성격의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무덤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인돌 축조에서 받침돌을 세우는 방법은 되파기를 하지 않았고, 성토하면서 세우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무덤방에서 덧띠 토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전라남도 지방이나 경상남도 지방과 더불어 고창 지역에서도 덧띠 토기 문화 단계, 즉 초기 철기 시대까지 고인돌의 축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