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5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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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墳 |
영어음역 | Gobun |
영어의미역 | Tumulu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최완규 |
[정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 있는 마한에서 백제 시대에 이르는 고대 무덤.
[개설]
고분은 과거 우리 조상이 묻힌 무덤을 통칭하는 옛무덤을 말하지만, 고고학에서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한정된 시대의 무덤을 말한다. 여기에서 한정된 시대란 고대까지를 말하는데, 고대 특히 삼국 시대 분묘를 의미한다. 본디 고분이란 인간의 마지막 통과 의례인 장례의 결과로 남겨진 기념물로서 당시인의 사유 체계와 내세관이 담겨져 있다. 무덤의 부장품을 통해 당시 문화의 수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창 지역의 고분은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있으며, 마한 및 백제 시대에는 주구묘와 분구묘, 석실분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마한 및 백제의 유적으로는 성남리, 광대리, 우평리, 예지리, 도산리, 남산리, 석교리, 봉덕리 등의 주구묘 유적과, 고창 봉덕리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분구묘 유적, 그리고 오호리 신지매 등의 석실분 등이 있다. 여기서는 주구묘, 분구묘, 석실분 등의 순서로 고창 지역 고분 유적과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구묘(周溝墓) ]
주구묘와 대형 분구묘는 마한의 대표적인 무덤이라 할 수 있다. 주구묘는 성남리, 만동, 예지리, 광대리, 남산리 등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주구묘의 배치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마한 사회가 혈연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는 내용을 충실히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점차 대형 분구묘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주구묘의 입지는 낮은 구릉의 사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보인다[성남리, 광대리, 남산리 등]. 매장 주체부는 대상부의 중앙에 토광을 안치하고 있지만 대상부의 치우친 부분이나 주구에 옹관이 안치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주구묘의 형태는 제형[예지리], 방형[성남리], 장타원형[광대리] 등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한 쪽 변에 개방부를 두고 있는 점이 대부분의 유적에서 보인다. 주구묘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토기류, 철기류, 옥 등이 보이고 있다. 특히, 토기류는 이중 구연호와 단경호가 주를 이루고 있는 상태이다.
[분구묘(墳丘墓)]
1. 분구묘의 입지
분구묘는 봉덕리 고분군, 부곡리, 군유리, 용수리, 덕림리, 석남리, 장산리, 죽림리, 도산리, 학천리, 사내리, 향산리 등이 확인되었다. 대형 분구묘의 입지는 주로 구릉 정상부에서 말단부에 걸친 능선 상에 두고 있지만 이외에 산사 면과 평야에 있는 것도 있어 다양성을 보인다. 구릉 정상부의 경우는 대체로 해발 50~70m 정도이며, 주변에는 곡간 평야가 펼쳐져 있기 때문에 주변을 조망하기에 용이한 곳에 해당된다. 또한, 멀리서도 대형의 분구묘가 구릉 정상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이게 하여 대형 분구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입지이다. 이러한 입지를 택하고 있는 유적은 봉덕리, 석남리, 장산리 분구묘를 들 수 있다.
고창 지역 대형 분구묘 중 봉덕리 1호분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분구 내부에서 석실 5기와 옹관 2기 등의 매장 시설이 확인되었다. 1호분 분구의 조성과 매장 시설의 축조는 지형을 고려하여 묘대를 마련하고 정지한 후, 분구 중앙에서부터 매장 시설의 축조와 동시에 개별 분구를 성토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분구 내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현재와 같은 거대한 분구가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분구 내에 위치한 매장 시설에서는 금동식리[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백제 금동 신발], 금제이식(金製耳飾), 중국제 청자 반구호[주둥이가 소반처럼 생긴 병], 소호장식유공광구호(小壺裝飾有孔廣口壺), 대도, 성시구(盛矢具), 대금구(帶金句) 등 중요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로 보아서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상당한 정치 세력으로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군유리 분구묘는 평지에 그 입지를 두고 있는데, 주변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역시 가시적으로 대형 분구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어 분구 축조의 의도가 잘 반영된 예라 하겠다. 이 밖에 구릉의 말단부에 조성된 예는 부곡리, 용수리, 덕림리, 신촌리 등 주로 단독분인 경우가 많아 앞서 살펴본 것들과 대비되지만, 역시 이들 고분 앞에도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어 분구 축조 의도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2. 분구의 형태
분구의 형태는 원형, 절두 방대형, 전방 후원형 등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절두 방대형이나 전방 후원형의 분구묘가 원형에 비해 규모가 크다. 이러한 차이가 출자 계통의 차이인지 아니면 시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 하겠다. 이들 대형 분구묘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그 성격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지표 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예견해 볼 수는 있다.
1) 원형: 원형 분구묘에서는 분구 정상부에 노출된 석재들이 대체로 횡혈식 석실분의 축조재로 판단되며, 분구와 석실의 규모를 비교해 보면 다장의 가능성 보다는 단장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분구 중앙에 석실분 1기를 안치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예는 덕림리와 석남리 4호분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전자의 경우 개석으로 추정되는 대형 판상석이 노출되어 있으며, 후자는 벽석들이 안정된 상태로 노출된 상태이다.
2) 절두방대형: 절두 방대형과 원형 분구묘는 분형이나 규모 그 자체도 차이를 보이지만 매장 주체부에서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영산강 유역의 연구 성과를 참고하면 절두 방대형에서 원형 분구묘로 이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시기는 대체로 5세기 전반에서 중반에 걸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전방 후원형: 칠암리에서 발견된 전방 후원형 분구묘는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북쪽에 해당하는 것으로, 분포 위치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매장 주체부는 석실로 후원부에 분구의 장축과 다른 방향으로 안치되어 있는데 광주 월계동의 예와 비교될 수 있다. 이러한 전방후원형의 분구묘는 고창 지역의 절두방대형, 원형 분구묘와의 관련성뿐만 아니라 고대 한·일 간의 문화교류에 대해서도 그 성격을 규명해야 할 새로운 과제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석실분]
고창 지역에서 백제 시대 고분은 마한 분구묘에 비해 간헐적이면서 군집보다는 단독분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현재까지 자료는 상갑리, 죽림리, 예지리, 율계리 등에서 석실분이 확인되고 있고, 고분에서 출토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토기류가 대동리, 석교리, 장곡리 등에서 직구호, 삼족기, 병형토기 등이 수습되었다. 석실분 유형을 보면 상갑리와 죽림리의 것은 웅진 3식으로 6세기 말이나 7세기에 해당하며, 예지리의 석실은 전형적인 사비 2식으로 7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오호리 신지매 유적에서는 6기의 석실분이 확인되었다. 그 중 3호분은 웅진 2식의 석실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금제 이식과 더불어 ‘□의장군지인(□義將軍之印)’ 명(銘)의 청동 인장이 출토됨으로써 고분 피장자의 신분을 짐작케 해 주고 있다. 4호분에서 출토된 직구호, 병형토기, 개배[뚜껑 접시] 등과 더불어 고분의 구조와 비교해 보면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백제 시대 고분의 존재는 백제 중앙 세력의 영산강 유역권 진출이 6세기 초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는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