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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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鎰夫婦忠旌閣 |
영어음역 | Jeong Il Bubu Chungjeonggak |
영어의미역 | Memorial Shrine to Jeong Il and His Wif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 58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혜숙 |
건립 | 16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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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 1707년 |
현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 587 |
성격 | 정려각 |
정면 칸수 | 2칸 |
측면 칸수 | 2칸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에 있는 정일 부부의 정려각.
[개설]
영일 사람인 진사 정일(鄭鎰)의 자는 경중(輕重), 호는 송암(松巖)인데, 1556년(명종 11) 2월 16일 영일 정씨 정사신(鄭思信)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3년간 죽만 먹으며 애도하여 널리 효자로 이름이 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정일은 움직일 수도 없이 앓고 있었는데, 왜병이 몰려 왔을 때 부인 덕산 윤씨가 단신으로 정일을 이불에 싸서 엎고 못가 갈대 속에 숨기고 왜병을 다른 데로 유인하였다. “당신만이라도 사셔야 합니다.”라고 하고 자신은 도암담에 몸을 던져 정절을 보전하였다.
종 막개(莫介)도 “내 어찌 주인을 따르지 않으랴.” 하며 못으로 뛰어들어 주인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 아내의 희생으로 살아난 정일은 임진년 겨울에 결국 왜병에게 잡혀 가게 되었을 때 “내 이 나라 백성이 되어 어찌 너희를 따를 수 있겠느냐.”고 준엄히 꾸짖으니 적이 노하여 정일을 칼로 베었다. 종 계화(戒花)는 정일의 세 살 난 아들을 업고 도망쳐 목숨을 구했다. 그 때 정일 부부의 나이가 36살이었다.
천행으로 목숨을 건진 정일의 아들은 외가에서 계화의 지극한 보호로 훌륭히 성장하여 대를 이었다.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부와 충절을 지킨 정일, 주인을 위해 몸 바친 노비를 함께 삼강세가(三綱世家)로 칭송하고, 1635년(인조 13) 정일은 지평(持平)에 추증되었으며 정려가 내려졌다. 부인 덕산 윤씨의 정려는 1707년(숙종 33)에 내려졌다.
[위치]
김천시 조마면 장암2리 도암마을에서 지례로 가는 300m 떨어진 오른쪽 산언덕에 큼직하게 지어진 정려각이 감천을 굽어보고 서 있다.
[변천]
한 집안에서 충절 세 사람이 나서 후세에 본보기가 되자, 정일에게 1635년(인조 13)에 사헌부지평(司憲府 持平)에 증직하는 정려가 내려졌고, 부인에게는 1707년(숙종 33)에 정려가 내려졌다. 이에 현 위치에 정려각을 세웠다.
[형태]
정일 부부 충정각은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정면 2칸, 측면 2칸의 비각으로, 돌담 위에 세워져 있다. 정면은 홍살로 되어 있으나 색은 칠해져 있지 않고, 나머지 세 면은 2/3는 담으로 나머지 1/3은 홍살로 되어 있다. 정려각 왼쪽에는 ‘효열송암처사성균관진사오천정공지려(孝烈松岩處士成均館進士烏天鄭公之閭)’라는 정판(旌板)이 걸려 있고, 오른쪽에는 ‘절부성균관진사효열정일처의인덕산윤씨지려(節婦成均館進士孝烈鄭鎰妻宜人德山尹氏之閭)’라는 정판이 걸려 있다.
[현황]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어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충노 막개와 계화 부부의 충노비가 정려각 앞쪽에 망부석처럼 서 있다.
[의의와 평가]
다른 곳에서는 정일 부부 충정려로 부르기도 하는데, 선조들이 중히 여겼던 효와 정절, 충정심을 함께 느낄 수 있다. 한 집안에서 충절이 세 사람이나 나오는 등 선조들의 충절심을 특히 잘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