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833 |
---|---|
한자 | 寺址 |
영어음역 | saji |
영어의미역 | archeological site |
이칭/별칭 | 절터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홍영호 |
[정의]
강원도 강릉 지역에 남아 있는 절터.
[개설]
강릉 지역의 사지에는 굴산사지(掘山寺址), 보현사(普賢寺)[지장선원], 신복사지(神福寺址), 방현사지(坊縣寺址), 한송사지(寒松寺址)[문수사], 등명사지(燈明寺址), 안국사지(安國寺址) 등이 있고, 이들 사지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이 있다. 그밖에 특별히 지정된 문화재가 없는 사지들도 다수 있다. 사찰이나 사지는 여러 명칭으로 달리 부르는 경우도 많아 혼란스럽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사실상 최초의 문화유적분포조사라고 할 수 있는 일제 시대에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를 기준으로 하여 이후에 발견·조사된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폐사지를 정리한 후, 이들 사지들을 간략히 살펴보겠다.
[현황]
◦ 향호리사지(香湖里城址)[주문진읍 향호2리 816]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와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는 사곡에 있는 사지로 되어 있으나, 『문화유적분포지도-강릉시-(文化遺蹟分布地圖-江陵市-)』에는 성지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사곡이라는 지명이 살아 있으므로 이 일대에 절터가 있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 삼교리사지(三橋里寺址)[주문진읍 삼교리 572]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이미 신사라고도 불리운다고 언급하였고, 이후의 조사 자료들은 신사동사지(新寺洞寺址)로 명명하고 있다. 삼교동 본동에서 서북쪽으로 약 4㎞ 지점에 삼형제산봉이 있고, 이 산봉우리 밑에 절터가 있다고 전한다.
◦ 삼산리사지(三山里寺址)[연곡면 외동길 111[삼산2리 259]]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이미 청학사(靑鶴寺)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로 관련성이 엿보인다. 청학사는 『관동지(關東誌)』, 『관동읍지(關東邑誌)』,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강원도지(江原道誌)』 등에서 보이는데,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사찰조의 기사 내용을 소개하면 ‘靑鶴菴在府北七十里靑鶴山下十五間’으로 되어 있다. 이후에 간행된 조사 자료들은 삼산리사지(三山里寺址)를 청학사지의 범주에 넣어 서술하고 있다. 건물터로 추정되는 지역은 밭으로 개간되었는데, 축대와 수많은 기와 조각을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난 산길을 따라 약 4㎞ 들어가면 속칭 턱개 암자골이라는 지역에 부도 2기가 있다고 한다. 절터로 올라가기 전의 우측 밭[연곡면 삼산리 291-2번지]에는 석종형부도 5기[순파당, 증엄당, 환송당, 설와당, 심당화방서당]가 모여 있다.
◦ 장덕리사지(長德里寺址)[주문진읍 장덕리 1077]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장덕리사지가 원당곡의 전중(田中)에 있고, 원당사지(元堂寺址)라고 칭한다고 언급하였는데, 이후의 간행물에는 장덕리사지로 부르고 있다.
◦ 행전동사지(杏田洞寺址)[주문진읍 삼교골길 99[삼교리 행전동 816]]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 의하면 이곳 주민들은 ‘竹절골’이라 부르며, 수 년 전에 초막의 암자를 세웠다가 없애고 남은 유물은 없다. 약간의 와편이 보일 뿐이다. 이곳 주민들은 가끔 이곳에 와서 불공을 드린다고 하는데, 사지로서는 터가 매우 좁은 편이다.
◦ 유등리사지(柳等里寺址)[연곡면 유등리 백운동]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백운사지(白雲寺址)라고 칭한다고 언급하였고, 이후의 간행물들은 백운사로 언급하고 있다. 주변에는 옛 사찰에서 사용되던 장대석과 연화문 석재, 석조, 주초석, 기와편 등이 산재해 있다. 백운사(白雲寺)는 최백순이 편찬한 『동호승람(東湖勝覽)』 권3, 고사조에 1545년(인종 원년)을 전후하여 남전현 백운사는 율곡 이이, 성제 최옥 등 명유의 강례처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백운사가 새로 세워져 있다.
◦ 방내리사지(坊內里寺址)[연곡면 방내리 304번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방내리 불상과 방내리 탑으로 소개되었고, 이후의 문헌에서는 방현사지(坊縣寺址)라고도 부른다. 일명 방내리 교동 탑골로 불리고, 고려시대 양식의 3층석탑[유형문화재 36호]과 머리가 결실된 석불좌상이 남아 있다. 창건설화를 보면 효소왕 때 처묵화상이 창건한 방현사(坊縣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청송사사적기(靑松寺事蹟記)」에 전하며, 혹은 자장율사가 세운 절이었는데 폐사되자 월정사를 창건하면서 불상만 이전하고 탑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무진사(無盡寺)의 옛 터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인근에는 1898년에 건립한 청송사(靑松寺)와 1937년에 세운 송라사(松蘿寺)가 위치하는데, 「청송사사적기」에 의하면 청송사의 철불이 방내리사지에서 출토되어 옮겼으나, 1991년에 도난당하였다. 또한 방내리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연화대좌 상대석이 청송사에 있으며, 송라사에도 이곳에서 발견되어 옮겨진 석조약사여래 좌상[유형문화재 제129호]이 봉안되어 있다.
◦ 보현사(普賢寺) 지장선원지[성산면 보현길 396[보광리 산 544]]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보광리 비석’이라 하여 보현사 경내에 있으며, 낭원대사 오진탑비도 소개하였다. 이후의 조사 자료들은 물론이고, 각종 옛 문헌에서도 보현사로 소개하고 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세운 낭원대사 오진탑비에는 보현산 지장선원으로 되어 있으며, 창건은 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낭원대사는 신라 말기 9산선문의 하나인 도굴산문의 개조 범일의 제자인 낭원 개청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여지도서(輿地圖書)』·『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지장사(地藏寺) 또는 지장암(地藏庵)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기록인 『범우고(梵宇攷)』에는 보현산 지장사로 먼저 나오고 지금 폐지되었으며, 보현사(普賢寺)가 뒤를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근 강원문화재연구소의 시굴 결과 건물지 일부가 조사되기도 하였다. 소장 문화재로는 940년에 세워진 낭원대사 오진탑[보물 제191호], 낭원대사 오진탑비[보물 제192호]와 보현사 대웅전[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37호, 조선 후기]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옛 사지와 관련된 문화재로 보현사 탑재, 보현사 석사자상 등도 있다.
◦ 관음리사지(觀音里寺址)[성산면 관음2리 774, 安谷]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안국사지(安國寺址)로 칭한다고 하였는데, 이미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등에 안곡사로 기록되었다. 이후의 조사 자료들도 안국사지(安國寺址)로 소개하고 있다. 실제 1994년 관동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서 ‘안국사’라고 적힌 명문기와를 수습한 바 있다. 절터에는 고려시대의 5층석탑[유형문화재 제112호] 등이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내곡리사지(內谷里寺址)이며, 심복사지(尋福寺址)로 칭하고 있다. 그러나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 및 석증조에는 신복사(神福寺)로 기록되어 있고,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신복사(神福(寺))'이라 쓰여진 기와가 많이 발견·발굴된 바가 있어 신복사가 정확한 사찰명이라 할 수 있다. 절터에는 고려시대의 3층석탑[보물 제87호]과 석불좌상[보물 제84호]이 있다.
◦ 옥천동사지(玉川洞寺址)[옥천동 일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옥천정(玉川町)에 불상, 탑, 당간지주 2기가 소개되어 있다. 그 후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부터 옥천동사지, 무진사지, 용지사(龍池寺), 하슬라사지 등이 혼용되고 있다. 주요 유물은 대창리 당간지주[보물 제82호], 수문리 당간지주[보물 제83호], 강릉 귀부[문화재자료 제2호], 석조여래입상[문화재자료 제3호], 석탑재[문화재자료 제4호], 석조약사여래좌상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귀부는 임당동 귀부, 교동 귀부로 혼용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주요 유물들은 통일신라 -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
◦ 한송사지(寒松寺址)[남항진동]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남항진리사지(南項津里寺址)이며, 한송사지로 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의 조사 자료들도 한송사지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옛 문헌들에는 문수사(文殊寺)로 기록되어 있어 양자가 서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요 유물은 고려시대의 석불좌상 2구[국보 제124호 및 보물 제81호]가 있고, 그밖에 석탑재 등이 있다.
◦ 굴산사지(掘山寺址)[구정면 학산리 731-2, 603-1 일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부도탑과 당간지주를 소개하면서 굴산사(掘山寺)로 칭한다고 기록하였다. 이후의 조사 자료는 물론이고, 각종 옛 문헌에서도 굴산사지로 소개하고 있다. 847년(신라 문성왕 9) 범일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신라 말기에 유행하는 선종 9산의 하나에 속한다. 현재 굴산사터는 지방기념물 제11호이며, 당간지주[보물 제85호]와 부도[보물 제86호], 석불좌상[문화재자료 제38호] 등이 있다. 대부분의 주요 유물들은 통일신라 말기 -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정동진리사지(正東津里寺址)이며, 등명사지(燈明寺址)로 칭한다고 기록되었다. 이후의 조사 자료는 물론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도 '등명사지(燈明寺(址))'로 등장하고 있다. 창건 시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이곡의 「동유기」에서 ‘등명사에 와서 해돋이를 보았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고, 유물로는 폐석탑재의 양식으로 볼 때 고려 초기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 주요 유물은 고려시대의 5층석탑[강원도유형문화재 제37호]이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낙풍리 뒤쪽 사곡의 전중에 있고, 정토사지(淨土寺址)라고 칭한다고 기록되었다. 이후의 조사는 최근에 이루어져서 『문화유적분포지도-강릉시-(文化遺蹟分布地圖-江陵市-)』에는 낙풍리 절골 사지로 윗낙풍리 버스 타는 곳에서 절터골로 20여 분 올라가면 약간의 기와편이 보인다고 소개되었을 뿐이다. 문헌상으로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서 옥계면에 있고, 폐사된 정토암이 있다고 기록되었으므로 낙풍리 절골 사지가 정토암(淨土菴)일 가능성이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석병산 동록 사곡의 전중에 있고, 산계사지(山溪寺址)라고 칭한다고 기록되었다. 이후의 조사들에서도 산계사지로 소개되고 있다. 문헌상으로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산계암이 산계령 밑에 있다고 기록되었으므로 이 절터를 산계사지로 볼 수 있다. 주요 유물은 3층석탑[문화재자료 43호]이 있다.
◦ 흑암사지(黑岩寺址)[구정면 창파동 절골]
이 절터는 『명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溟州郡의 歷史와 文化遺蹟)』에 처음 소개되었다. 구정면 창파동 절골의 매봉산 아래에 1984년에 창건된 청학사(靑鶴寺)의 경내에 석불좌상, 석조광배, 부도탑재, 금동여래입상, 금동보살입상이 보관되어 있다. 현 주지 스님에 의하면 1970년대 초 전 주지스님이 구 사지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수행을 하다가 ‘흑암사(黑岩寺)’라고 명기된 수 점의 기와편과 이들 유물들을 발견하여 보관하다가, 현 주지스님이 지금의 청학사 자리로 옮기면서 이들 유물들을 이전하였다고 한다. 청학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5점의 명문기와는 ‘黑○○’·‘黑岩○’·‘○岩寺’·‘○福寺’ 등이며, ‘○福寺’ 명문기와는 신복사(神福寺)일 가능성이 있다. 흑암사 명문 기와를 비롯하여 유물들은 양식적으로 보아 고려시대가 중심 시대이다.
이 절터는 『문화유적분포지도-강릉시-(文化遺蹟分布地圖-江陵市-)』에 처음 소개되었다. 경작지 일대에 많은 도자기편과 질그릇편, 약간의 기와편들이 산재하며, 경작지 소유자인 최장수 씨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이곳에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전해 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