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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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剛山城 |
영어음역 | Geumgangsanseong |
영어의미역 | Geumgangsanseong Fortress |
이칭/별칭 | 만월성,아미산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산 1-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려/고려 |
집필자 | 김흥술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6월 2일 - 금강산성,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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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금강산성, 문화재자료로 재지정 |
성격 | 성곽 |
양식 | 석성 |
건립시기/연도 | 고려시대 |
관련인물 | 마의태자 |
높이 | 1~5m |
길이 | 6㎞ |
둘레 | 6㎞ |
깊이 | 1~3m |
면적 | 900,000㎡ |
소재지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산 1-1 |
소유자 | 강릉시 |
문화재 지정번호 | 강원도 문화재자료 |
[정의]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청학동 소금강 지역에 있는 고대 산성.
[개설]
금강산성은 해발 714m의 소금강산을 정점으로 하여 노인봉(老人峰) 쪽으로 피동 부근의 남쪽에 위치한 산성이다. 성이 위치한 이 지역은 1970년 11월 18일 명승 제1호로, 1975년 2월 1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청학동 소금강’ 지역으로 금강산성은 1984년 6월 2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강원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소금강산은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20㎞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서쪽의 노인봉[해발 1338.1m], 남쪽의 매봉[해발 1173.4m]과 북쪽의 천마봉[해발 1094.1m]의 세 봉우리 사이의 해발 600~700m의 능선을 따라 산성이 축조되었다. 노인봉에서 발원한 하연곡천이 흘러 연곡천과 만나기 전에 이곳 청학동 소금강 지역에 낙영폭포, 천폭포, 상팔담, 광폭포, 구룡폭포, 연화담 등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건립경위]
금강산성은 신라의 마의태자가 재기를 위하여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고 『의사열전』에는 고려 충숙왕의 부마인 최문한의 아들 최극임이 의병을 거느리고 성을 쌓았다는 설이 있다. 율곡 이이의 「청학동유산록(靑鶴洞遊山錄)」에서 알려지기까지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던 명승지로 그 후부터 조금씩 기록되고 있다. 금강산성의 축조 시기와 목적 등에 대하여는 밝혀진 바가 없다. 근간의 여러 기록에서 고구려 계통의 성곽으로 추정하여 전하고 있다. 이 지역은 처음 고구려 영역이었다가 신라가 468년(자비왕 11)에 이곳을 차지한 이후 신라 말까지 말갈과 접경하였던 지역으로 생각된다. 당시 금강산성은 니하성(泥河城)으로 불렸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와 관련한 연구 성과의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니하성(泥河城)의 현재 행정구역은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청학동이다. 연곡면은 강릉에서 북쪽 3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연곡면에서는 서쪽에서 동해안으로 흐르는 연곡천이 있는데 그 길이는 60리에 달한다. 연곡면 사무소에서 서쪽으로 12.5㎞ 떨어진 연곡천의 중류는 장천(長川)으로 불리는데 장천에서 서쪽으로 8.6㎞ 떨어진 곳에는 산성이 있다. 산성에서 서남쪽으로 7.5㎞ 떨어진 곳에는 니현(泥峴)[진고개]이 자리잡고 있다. 연곡천의 발원지가 니현이며 해발 1072m이다. 니현에서 동북쪽으로 7.5㎞ 떨어진 해발 716m고지에 산성이 있는데 『임영지(臨瀛志)』에는 이 산성이 아미산성으로 기록되었으나 근거는 확실치 않고 축성년대는 미상이다. 연곡천의 중류가 장천으로 불리고 또 발원지가 니현 이라는 것은 니하성의 위치를 고증함에 있어 결정적인 뒷받침이 되는 것이다. 니현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강원도편에 명백하게 나와 있을뿐더러 니현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내리고 있으므로 이를 니하(泥河)로 불러 마땅하다. 니하는 일명 니천으로 불리는 바 장천은 니천과 명칭상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다. …
위의 기록을 보면 금강산성은 신라에 의해 가장 많이 활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약용은 『신당서(新唐書)』「발해전(渤海傳)」에 명기된 니하를 강릉 이북, 양양 이남의 장소로 단정하여, 신라 통일 이전 동해안에서 신라와 말갈의 공방전이 벌어졌던 강릉 근교의 니하라고 하였다.
금강산성은 고려시대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시 피난하여 싸우는 지방민의 피난처로 판단되며, 이후 조선시대 율곡 이이가 소금강을 탐승하고 청학동이라 명명할 때까지 활용되지 않았으며 일반에 잊혀진 상태였던 것이다. 금강산성과 관련한 율곡 이이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지정(智正)이 말하기를 “여기(靑鶴寺)서부터 서쪽으로 4리쯤 가면 조도(鳥道)가 있어 그 이름을 ‘관음천(觀音遷)’이라 하고 그 서쪽에 돌문이 있으며 돌문 안에 식당암이 있고 식당암 서쪽에 산성이 있어 성벽이 지금도 완연하다. 다시 5리쯤 가니 석봉이 우뚝 솟았다. 그 중에 하늘에 닿을 만한 봉우리가 무릇 셋으로 구름이 둘렀고 험준한데, 맑은 물이 그 사이에서 쏟아지고 있으며, 그 봉우리는 위에는 청학소가 있으나 암벽이 위태로워 한 번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산성의 구축이 어느 시대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 이를 처음 구축한 자는 피란을 위한 관리나 백성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이 돌문을 찾아왔었다면 어찌 한 마디의 말도 후세에 남겨놓은 것이 없었겠는가. 아니면 혹 그러한 사람이 있었어도 이미 잊어버린 것일까. …
위의 기록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금강산성은 오래도록 일반에 잊혀진 전설 속의 성곽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 후 옛 기록에 청학동 소금강의 경승과 이 성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있으나 근래까지 특별한 기록이 없다가 『전국유적목록』에 ‘금강산성(金剛山城)’이라 하였으며 지역 향토지와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 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형태]
금강산성은 연곡면 삼산리의 청학동 소금강에 있으며 산세를 이용하여 축조한 돌성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의 길이만 8㎞나 되며 아미산성 또는 만월성이라고도 불린다. 금강산성의 축조 방식은 대공산성과 같이 고구려 축성식(퉁구스식)으로 축조되어 있다고 고증되고 있다. 금강산성의 축조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금강산성의 주위에는 사형장, 수양대, 대궐터, 연병장, 망군대 등의 명칭을 가진 곳이 산재해 있어 많은 군사가 이 성내에 주둔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 주위에는 연병장, 수양대, 망군대, 사형장 등으로 불리는 곳이 있다. 현재 8㎞ 가량 석축의 흔적과 동문, 서문지와 약 30m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다.
[현황]
현재 금강산성은 구룡폭포 부근의 동서쪽 능선을 따라 구축되어 있으며, 약 200m 정도 높아지는 능선을 따라 오르면 석축 흔적이 보이기 시작하여 약400m(해발525) 지점 약간 평평한 곳에 망대로 보이는 축단이 있다. 이곳에서 다시 약 500m 정도 오르면 해발 625m의 능선 정상부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80°가량 꺾어지는 능선을 따라 성벽은 계속 이어져 버선바위를 지나 해발 715m의 정상부까지 약 1.0㎞ 정도 더 이어진다. 이곳에 폭 약 8m, 길이 약 20m 정도의 평지가 처음 보인다. 이곳은 건물지로 생각되며 산 정상부 석축으로 감아 돌며 문을 조성하였는데, 동문지에 해당된다. 이곳부터 성벽은 낮아져 다시 절벽을 이루는 바위산 오른쪽 능선을 따라 약 50° 정도 안쪽으로 꺾어서 약 200m 정도 내려오다가 깎아지른 절벽을 왼쪽으로 150m 정도 돌아서 약간 평평한 곳에 다시 문지가 만들어져 있다. 계속 낮아지는 능선을 따라 약 600m 정도 내려오다가 구룡폭포 계곡 100m 정도의 약간 평평한 곳에서 성벽이 마무리되었다. 북쪽으로 흐르는 계곡의 서쪽으로 폭 약 70~80m, 길이 100~150m에 이르는 넓은 건물지가 확인된다. 그리고 계곡의 서쪽 가파른 능선을 따라 구룡폭포 입구까지 약 200m의 성벽이 축조되어 있다. 성벽은 험한 바위산에 축조한 성으로 성벽의 높이는 1m~5m로 기복이 심하며 바위 사이에 석축을 끼우듯이 연결하기도 하였으며 성벽의 두께도 일정치 않으며 난층쌓기로 축조되었다.
동벽의 내외 측면은 모두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루었고, 그 사이의 능선부는 극히 좁고 기복이 심하다. 성 안에는 암벽이 많으며 곡지를 제외하면 보행이 곤란한 곳이다. 구룡폭포 근처는 좁지만 내부의 곡지는 넓은 편이다. 크기가 다양한 반려암으로 축조되었고 성벽의 규모는 위치에 따라 다르며 높이 1~5m, 상부의 폭 0.5~2m, 총길이는 약 4㎞이다.
성 안에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평탄지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며 토기나 와편 등의 유물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이 성은 연곡천변 교통로보다 노인봉[해발 1338m]을 중심으로 하는 태백산지 분수령 쪽에 더 근접하여 입지상 이해가 어려운 특색을 보인다. 동벽은 높아지는 능선을 따라 정상부까지 이어지고 이곳에 문을 만들고 계곡 안으로 꺾어져 동남쪽과 서북쪽에 곡지를 둔 평행사변형에 가까운 방형 성곽이다. 성벽이 연결될 수 없는 자연지세 위에 축조되었으나 계곡이나 절벽을 이용하여 방어벽을 구축하고 있다. 내부에 구룡폭포의 풍부한 수원(水源)을 갖추고 있는 천연의 요새이다. 그러나 진입하기가 쉽지 않은 오지에 축조된 성으로 난층의 축조 수법이나 성곽 입지상 고려시대에 축조된 피난성으로 추정된다.
성의 동쪽 폭 10m 남북 40m의 주능선과 연결되는 부분에 문터가 있고 북서쪽에서 남으로 꺾어진 부분의 14m는 폭 3.6m, 높이 3m가 완형(完形)으로 남아 있다.
남벽의 180m는 높이 2m, 폭 1.5m의 자연석을 이용하였고 치성처럼 돌출된 곳은 남벽에도 폭 10m, 길이 20m 정도가 있다. 또 커다란 바위나 바위산을 이용한 곳이 있고 자연 능선을 이용하였으며 성 안은 급경사로 좁다.
서벽은 구룡폭포골과 청학계곡 사이의 북에서 남서로 높아지는 해발 400~450m의 능선에 축성되었는데 약 200m 정도만 축성되었고 갑자기 높아지는 산세를 서벽으로 활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서벽이 축조된 200m의 능선 너머에는 남서에서 북동으로 흐르는 청학계곡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역이다. 성벽 축조 흔적이 없는 높은 산정으로 자연 망대 역할을 할 수 있는 넓은 바위들이 산재해 있다. 서벽은 비교적 많이 붕괴되었으며, 훼손된 기저부 폭은 1.5m~2m 정도이다. 금강산성은 전반적으로 많이 붕괴되었으나 석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온전한 편이다.
[의의와 평가]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로 미루어 강릉 지역에 남아 있는 산성으로 대공산성과 함께 고대 산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자연 지세를 최대한 활용하고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한 성곽의 축성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호국 유적지이다. 앞으로 충분한 조사와 연구가 진전되어야 할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