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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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陵大公山城 |
영어음역 | Daegongsanseong |
영어의미역 | Daegongsanseong Fortress in Gangneung |
이칭/별칭 | 대공산성,보현산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산 544번지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김흥술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9년 5월 30일 - 강릉대공산성, 강원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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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강릉대공산성, 강원도 기념물로 재지정 |
성격 | 성곽 |
양식 | 석성 |
건립시기/연도 | 삼국시대 |
관련인물 | 민용호 |
높이 | 2~4m |
길이 | 폭 상부 1.5~2m|하부 5~7m |
둘레 | 4㎞ |
면적 | 약 157,800㎡ |
소재지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산 544번지 |
소유자 | 국유 |
문화재 지정번호 | 강원도 기념물 |
[정의]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와 사천면 사기막리에 걸쳐 있는 고대 산성.
[명칭유래]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도읍지로 정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축조하였다는 전설과 발해의 대씨(大氏)가 쌓았다 하여 대공산성(大公山城)이라 불리운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가까운 곳에 보현사가 있어 보현산성(普賢山城)으로도 불린다.
전설로 전해 오는 백제의 온조왕이나 발해의 대씨가 쌓았다는 설은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거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이전에 이 지역은 고구려 영역이었고 백제는 이곳까지 힘이 미칠 수 없었으며, 5세기부터 시작된 신라와 말갈의 접경 지역은 니하성(泥河城)으로 판단하는 견해도 있으나 발해의 대씨가 축조한 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9세기 말엽까지 신라와 말갈이 대치한 곳이 니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를 인정한다고 해도 이 성과 발해 대씨와의 관계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조선시대 지리지들이 보여 주는 보현사의 존재와 관련한 명칭으로 보현산성이 더 타당성 있어 보인다.
한편, 산성에 대한 옛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처음 보이며 ‘파암산석성(把巖山石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의 지리지 기록에서는 모두 ‘보현산성(普賢山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서는 ‘대공산성(大公山城)’으로 기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서 이 성을 ‘대공산성(大公山城)’으로 칭한 것은 오류라고 생각된다. 이를 인정하고 비판 없이 문화재지정 명칭으로 삼은 것도 잘못이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보현사(普賢寺)가 신라 말 굴산사의 말사로 개창된 후 본 산성이 위치한 산의 명칭이 보현산으로 불렸으며, 이에 따라 모든 지리지들이 ‘보현산성’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현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성곽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대공산성(大公山城)은 강릉시에서 서쪽으로 약 20㎞ 지점에 위치한 높이 2m, 둘레 3㎞ 정도의 석성(石城)이다. 보현사에서 서북 방향 약 2㎞지점, 해발 1,131m의 곤신봉(坤申峰)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해 있다. 노인봉에서 곤신봉, 능경봉으로 이어지는 태백산맥에서 동쪽으로 돌출된 944m의 보현산에 타원형으로 축조되어 있다. 이 성은 남쪽의 제왕산성, 동남 방향의 칠봉산성, 명주성 등에 둘러싸인 고대산성의 거점 성으로 판단된다.
[형태]
전체적으로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길쭉한 타원형의 평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성벽은 두께 40×50×20㎝ 정도의 돌로 쌓았다. 높이 1.5~2.5m, 상부 폭 1.5m, 하부 폭 7m 정도로 축조하였다. 성 전체 모양은 남서에서 북동으로 길고, 북서에서 남동이 좁은 형태이다. 북동의 동문지로 보이는 곳은 성안의 물이 흘러내리는 수구(水口)이며 성내(城內)의 가장 낮은 지역이다. 바깥쪽은 석벽(石壁)이고, 안쪽은 두께 약 5~7m 정도의 토벽(土壁)으로 쌓은 구조이다. 동문지(東門址)의 안쪽은 성벽과 나란하게 방공호 모양(內隍)을 두고 그 곳으로 물을 흐르게 하여 성벽을 보호하고 있다.
산성은 남서쪽 끝 남문지(南門址)가 있는 정상 부근과 북쪽 끝이 돌출되어 치성(雉城)처럼 되어 있다. 남문지 근처에 망루대지가 있으며 남동쪽으로 폭 약 5m, 길이 79~97m의 치성 끝에도 망루대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산성의 방어 정면이 남쪽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대공산성은 남고북저형의 지형에 축조되었으며, 현재 성벽도 동남 방향으로 잘 남아 있으며 북벽은 붕괴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이 산성은 신라와 고구려와의 무력 충돌이 빈번했던 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성의 중심에서 북쪽지역 저지로 내려간 곳에 우물 2곳이 있고, 남쪽의 우물물이 북서쪽으로 흘러내리고 그 위 북쪽에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성의 정문으로 생각되는 동문 근처에 석원(石垣)을 갖춘 우물이 있으며, 성안의 수원은 풍부하며 우물 근처에 일부 늪지대가 있다. 동문 입구에 2m 간격으로 주초석이 앞쪽에 있는데 95×104㎝의 장방형 석재이다. 석재는 성문 안쪽에서 22㎝ 정도에 2개의 둥근 문추공(門樞孔)이 있는데 지름 25㎝, 깊이 3~5㎝ 이며 바깥쪽으로 가로 17㎝, 세로 9㎝, 깊이 3㎝의 네모진 구멍이 2개씩 있어 성문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평탄지가 곳곳에 있으며, 평탄지에서는 고려~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많은 양의 토기편과 와편, 백자편, 그리고 청자편도 일부 산재해 있다.
[현황]
을미의병(乙未義兵) 때 민용호(閔龍鎬) 부대는 1896년 1월 13일 원주에서 일어난 이후 약 10개월간 대일항전을 하였다. 민용호 부대는 원주에서 강릉으로 동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보현산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민용호는 정부군이나 일본군과 평지에서 맞서기보다는 산악 지대인 관동 지방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였던 것이다.
민용호 부대는 1896년 1월 17일 원주를 떠나 1월 29일 대관령을 넘어 강릉성 밖의 구산까지 행군하였으며, 2월 1일 강릉에 입성하였다. 그 후 원산으로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4월 초순에 강릉으로 귀환하였다. 관군의 공격으로 5월 24일 강릉에서 물러나 동해안을 따라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현산성이 을미의병 때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격전을 치루어 낼 정도로 의병의 근거 성(城)으로서는 활용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의의와 평가]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고대사 속에서 이 성곽의 비밀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강릉 지역의 가장 오랜 산성이며 영동과 영서를 잇는 대관령 지역에 축조되었던 고대 산성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1979년 5월 30일 강원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강원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