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26 |
---|---|
한자 | 許格 |
이칭/별칭 | 춘장(春長),창해(滄海),아호(鵝湖),숭정거사(崇禎居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상배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앞 한강의 저자도에 살았던 조선 후기의 문인.
[개설]
한강 저자도에 살 때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청에 항복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태백산에 은거하며 학문을 하였고, 돌아와서는 저자도에 머물다가 죽은 문인이다. 평생을 효도하고 우애가 깊었으며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고 종일토록 책을 보며 문집은 저자도 시골집에 간직하였다.
[가계]
허격의 본관은 양천, 자는 춘장(春長), 호는 창해(滄海)·아호(鵝湖)·숭정거사(崇禎居士)이다. 아버지는 집의에 추증된 허회(許淮)이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문인으로 동악이 그를 보고 “절의를 세울 기상이 있다”고 평한 바 있다. 1607년(선조 40)에 출생하여 1691년(숙종 17)에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성품이 강직하고 문장에 능숙하였다. 아버지 허회와 함께 한강 저자도에서 모정(茅亭)을 짓고 살았다. 1636년(인조 14) 허격의 나이 30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태백산으로 피하였다가 조선이 청나라에 굴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원통히 여겨 태백산에서 나오지 않고 시헌력(時憲曆)을 없애고 『춘추』를 읽으면서 존양의 의를 부치고 읊조린 것이 있는데 모두 명나라를 사모한 것이다. 일찍이 숭정제의 어필로 된 사무사(思無邪)를 얻어 가평 조종리와 해주 수양산 형제동에 새기고 고을 선비들에게 이재묘(夷齋廟)를 세우도록 권장하였으며, 매번 3월 19일 명나라 의종의 휘일(諱日)에 향을 피우고 통곡하였다. 그 뒤 과격한 언사로 광주 옥에 10년간 갇혀 있다가 풀려나 저자도의 옛 집에 머물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향년 84세로 죽었다.
[상훈과 추모]
조정에서는 이조참의에 추증하였다.